전 과거사 조사단원의 고백 "文, 수사지시 신중했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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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김학의ㆍ장자연 사건 철저 수사’ 발언에 대해 재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과거사조사단 관계자가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준영 변호사(45ㆍ사법연수원 35기)는 지난달 29일 페이스북에 “언젠가는 조사단 활동을 하면서 내가 관여한 부끄러운 일들을 고백할 때가 올 것이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검찰과거사 조사단원으로 활동했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수사기록 검토에 참여하다가 지난달 25일 진상조사단원직을 사임했다. 박 변호사는 이른바 ‘약촌오거리 살인사건(2000년)’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10대 소년의 재심을 맡아 무죄를 끌어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고(故) 장자연씨 사건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 그리고 클럽 버닝썬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고 검찰과 경찰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진실을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고(故) 장자연씨 사건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 그리고 클럽 버닝썬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고 검찰과 경찰의 명운을 걸고 철저히 진실을 규명하라고 지시했다. (청와대 제공)

박 변호사는 과거사 사건 재조사가 각종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토로했다. 그는 “과거사 사건을 조사하고 지켜보면서 사건 속 다양한 이해관계를 봤다. 이익이 되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를 쓰고 반면에 모순을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모습도 봤다”며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라고 밝혔다.

“때론 세간의 의혹과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의 괴리도 확인했다”는 고백도 했다. 직접 조사를 해보니 피의자로 지목되는 이들에 대한 혐의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박 변호사는 “이걸 알거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의혹을 키우고 활용하는 ‘염치없는 자기목적성’도 보게 된다”며 두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상규명 지시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박 변호사는 “여성의 몸과 성이 착취당하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할 적폐다.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해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박준영 변호사. [연합뉴스]

박준영 변호사. [연합뉴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사건에 담긴 여러 이해관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알고 계셨다면 그 지시를 함에 있어 신중하지 않았을까”라고 지적했다. 최근 논란이 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논란도 언급했다. 그는 “대통령이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이런 투자를 알았다면, 대변인 임명 과정에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밝히며 김 전 대변인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함께 링크했다.

이어 “윤중천과 김학의의 잘못, 장자연 사건의 가해자들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었으면 한다”면서도 “단, 사건 속 여러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펴보고 정의로운 해결의 절차와 방식을 고민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박준영 변호사 페이스북 글 전문

<믿을만한 곳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상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함께 이 상황을 헤쳐나갈 믿을만한 곳이 없다는 데에 ‘서민들의 절망’이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데, 철이 들수록 조금씩 두려워진다.

지난 1년 동안 검찰과거사 조사단원으로 활동해왔다. 이번 달에 활동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보고서 작업 때문에 얼마간 이곳을 더 왔다갔다 할 것 같다. 언젠가는 조사단 활동을 하면서 내가 관여한 부끄러운 일들을 고백할 때가 올 것이다. 흠 많은 인간이지만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조사를 지켜보면서 사건 속 다양한 이해관계를 봤다. 이익이 되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를 쓰고 반면에 모순을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모습도 봤다. 이런 모습은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였다. 부끄럽지만, 관여하고 있는 재심사건 3건이 조사대상인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기목적적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그 목적성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때론 세간의 의혹과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의 괴리도 확인했다. 이걸 알거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의혹을 키우고 활용하는 ‘염치없는 자기목적성’도 보게 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사필귀정임을 믿는다.

여성의 몸과 성이 여러 형태로 이용되고 착취당하는 현실. 한국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할 적폐다. 이런 문제를 사건을 통해 공론화하고 해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건에 담긴 여러 이해관계와 문제점’을 충분히 알고 계셨다면 그 지시를 함에 있어 신중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대통령이 김의겸 대변인의 이런 투자를 알았다면, 대변인 선임과정에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윤중천과 김학의의 잘못, 장자연 사건의 가해자들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다.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었으면 한다. 단, 사건 속 여러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펴보고 정의로운 해결의 ‘절차와 방식’을 고민했으면 한다.

어렵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길게 보면 신뢰를 얻는 길임을 믿는다. 믿고 의지할 곳 없다는 서민들의 절망을 가장 우선시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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