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윤서 북 요원과 첫 접촉|영장을 통해본 서의원 방북 행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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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피의자 서경원 (52)은 평소 『한반도의 분단은 강대국의 대립과 강제에 의한 것이며, 8·15해방은 지배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고 남한이 예전에는 식민지였다면 지금은 신식민지주의다』라는 왜곡된 인식하에 『남북 통일은 민중이 가장 먼저 앞서야하며 이를 위해 남북 농민 대표가 판문점에서 만나 농업 정보와 종자교환을 하는 식으로 농민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학생 회담 및 체육대회·경제인 회담·국회 의원 회담 등을 차례로 거쳐 마지막으로 정치회담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실천방법을 모색해 왔다.
①85년 2월20일 벨기에 브뤼셀 소재 「가톨릭 국제농촌 청년연맹」의 회의참석 초청을 방은 「한국 가톨릭 농민회」대표로 선발되어 출국, 동 국제 농촌 청년연맹 사무실을 방문한 후 세계 60여개국에서 참가한 각국 대표자들과 함께 아프리카 말리 농촌현장체험 (10여일) , 코트디부아르에서 개최된 국제회의 참석 (20여일) 등 일정에 따른 행사 참가 후 혼자 구라파 지역을 관광, 여행했다.
▲85년 3월 중순께 서독 프랑크푸르트 시내 한국 교민 및 유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건물 회의실에서 현지 교민 및 외국인 학자 등 3O여명이 주최한 「한국 올림픽에 관한 토론회」 에 참석, 『현재 한국의 경제 여건하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무리』라는 등 토론내용을 방청한 후 집회에 참석한 현지교민 정모 박사(60세가량), 정모 목사(40세가량), 이모 목사 (70세가량) 등과 상호 인사하고 피의자 자신은 한국 가톨릭 농민회 회장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해 왔다고 소개하는 한편, 정 목사가『나는 해외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통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나와 뜻을 같이하는 몇몇 목사들이 세계교회 협의회 (WCC) 의 주선으로 스위스에서 북한의 목사들과 회의를 가졌는데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도 했으며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도 했다』라고 하자, 정 목사가 분명히 북한이나 동구라파 국가에 주재하는 북한 대사관 요원과 접촉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 주선을 부탁하면 피의자가 평소 주장해왔던 남북 농민 교류를 위해 북한의 인사들과 접촉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저도 민족통일은 민중이 먼저 앞서야하며 남북의 농민들이 만날 수 있 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정 목사가 만났던 북한의 목사나 구라파에 있는 북한 대사관 요원을 만나게 해주시오』라고 부탁, 그로부터 쾌히 응낙을 받았다.
▲또 4∼5일후 서독 보쿰시 거주 정 목사의 집에서 그가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 편으로 출발하여 국경 도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내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한의 해외 파견 요원 정모 (50세 가량) 및 그를 수행하는 신원 미상 남자 2명과 접촉, 위 정목사의 소개로 상호 인사를 교환한 후 정모에게 『민족의 통일문제는 남북의 민중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나는 남한의 가톨릭 농민회 회장으로서 농민운동을 하고있으며 남북 농민들이 종자와 가축을 교환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교류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통일문제를 논의키 위해 먼저 김주석 님을 만나고 싶다. 그런 다음 4대강국 대표들도 만나겠으니 주선해 달라. 그렇게 하면 나도 구체적인 얘기를 할수 있겠다』라고 말하여 정으로부터 『서 선생의 말을 옳게 생각합니다. 평양 방문을 주선하겠소』라는 말을 듣고, 그에게『제가 북에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꼭 정 목사를 통해 연락할테니 주선해 주시오』라고 말하고 이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한 후 그들과 헤어져 같은 해 4월15일 서독에서 항공기편으로 귀국하는 등 반 국가 단체인 북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의 구성원과 회합했다.
②▲88년 7월 일본 민간 단체인 「식량 자립을 생각하는 국제심포지엄 실행위원회」로 부터 동년 8월24일∼9월5일 일본에서 개최되는 동 심포지엄 참석 초청을 받아 피의자가 국회의원이 된 후 최초 해외 여행을 하게되자 피의자의 대표성 및 신분이 보장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차제에 서독을 경유, 입북키로 결심했다.
▲88년 8월10일 뉴욕소재 한인 감리교회에서 개최 예정인 「8·15 경축 행사」참관을 위해 항공기편으로 도미, 로스앤젤레스에서 피의자가 사전 연락하여 환영 나온 현지교민들의 영접을 받고 다음날 자동차편으로 뉴욕으로 향발, 뉴욕시 이하 미상 소재 한인 감리교회에서 주선한 롱아일랜드 소재 민가에서 체류하면서 3일간 계속된 8·15기념 행사에 참석, 그곳에서 뜻밖에 서독 교회 대표로 참석한 정 목사를 접촉하자, 그에게『그렇지 않아도 이번 기회에 정 목사를 만나 평양으로 가기 위해 서독으로 가려고 했다. 꼭 이번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 그로부터 서독 친구에게 연락하여 주선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그 2∼3일 후 정 목사로부터 서독에 연락하여 모든 준비를 완료하도록 조치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면 전에 만났던 정 박사가 마중 나와 있을 테니 그의 안내를 받으라. 나는 사정상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감사를 표시한 후
▲88년 8월18일 오전 10시쯤 항공기편으로 뉴욕을 출발, 오후 5시쯤 서독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피의자가 85년 그곳 「서울 올림픽에 관한 토론회」에서 상호 인사한바 있는 정 박사의 영접을 받고 그의 집으로 안내되어 1박하면서 그로부터『내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나가면 잠바를 입은 40대 안팎의 남자 2명이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들의 안내를 받으라』는 말을 듣고 다음날 오전 프랑크푸르트 공항 대합실에서 단신 대기중 피의자에게 접근해온 잠바 차림의 40대 남자 2명이 『서경원 의원입니까』라고 묻자『그렇다』고 대답하여 상호 확인, 접선한 후 그들로부터 『지금부터는 서 의원님의 여권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온 여권으로 수속하겠소』라는 주의를 듣고 그들을 따라 출국수속을 마친 다음 항공기편으로 출발. 같은 날 오전 11시쯤 체코 프라하공항에 도착하여 그곳에 대기하고있던 조선민항 특별기 편으로 출발, 기내에서 동행한 김 모 지도원 (40세가량) 에게 『통일 문제에 대해 김주석님과 이야기하고 천주교 평양교구의 복구 가능성, 북한의 농촌실태를 보고싶은데 3일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부탁하는 한편, 같은 날 오후 8시30분쯤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 북한 「조국 평화 통일 위원회」소속 김모(60세가량) 및 군장성으로 보이는, 2명의 영접을 받고 벤츠 승용차 편으로 대동강변 소재 영빈관에 안내됨으로써 반국가 단체인 북괴가 불법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 탈출했다.
③▲88년 8월20일 오전 9시 순안 비행장에서 피의자를 영접한 김모 (60세가량) 및 서독에서부터 피의자를 안내한 김모 (60세가량) 등이 위 영빈관으로 피의자를 방문하여『오늘 주석님을 만나게 된다』라고 고지하자 그들의 안내를 받아 자강도에 있는 김일성 별장을 방문, 그곳에서 북한 조국 평화 통일 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영접을 받고 접견실로 안내되어 김일성과 포옹,『주석님 처음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단둘이 기념 촬영을 한 후 별장회의실에서 허담 및 김모 (60세 가량) 등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과 회합, 그에게 『통일은 남북이 다 원하는데 방안이 무엇입니까』『북한에서도 북한 츨신 성직자들이 전교 활동을 하도록 해주시오』라고 말하여 그로부터『물론 평화 통일이다. 남북한 불가침 조약을 맺어야 한다』『총을 겨누고 있으면서 경제희담이다, 적십자 회담이다 하는 것은 모두가 허위다』 『우리는 종교활동을 하라, 하지마라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등 내용으로 30여분간 그들의 주장 및 설명을 들은 후 별장 식당으로 옮겨 김일성등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등 반 국가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의 수괴와 회합했다.
▲같은 날 오후 2시쯤 김일성 별장에서 그와 작별하고 김모 (60세가량) 의 안내를 받아 승용차 편으로 「삼지연」「항일 유격전본부(오두막지)」등 이른바 김일성 항일 유격전 유적지 등을 관광한 후 자강도 영빈관에서 1박하고, 다음날(8월21일)평양 시내 지하철·도서관·혁명 열사릉 관광 및 평양 극장에서 고전무용·관현악단연주·합창단 공연 등을 관람한 후 같은 날 오시5시쯤 대동강변 영빈관에서 허담과 회합, 그로부터 각종 선물을 받았으나 피의자는 귀국 후 염려가 된다고 이를 사양하다가 실내 슬리퍼1착 (증제1호)만을 휴대하고 그와 작별한 후 같은 날 오후6시쯤 순안 비행장에서 김모 안내원 등 2명과 함께 조선 민항특별기편으로 출발, 북경 공항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스위스 에어라인 항공기편으로 훙콩-스위스-취리히-프탕크푸르트」르 거쳐 이곳에서부터 다시 피의자의 여권을 이용, 일본 심프지엄참석 등 일정을 마치고 88년9월5일 김표공항 착 귀국하는 등 반 국가 단체인 북괴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으로 탈출, 그 단체의 수괴와 회합한자로서 구속하지 아니하면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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