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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로또 된 남자와 결혼할래요” 빈곤층 아이들 꿈은 슬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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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교실이데아 2019]

“우리 반 아이들이 적어 낸 장래희망을 보니 당황스럽다. ‘모르겠다’는 응답이 한두 명이 아니다. '모르겠다'는 차라리 낫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고 싶은 것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장래희망을 ‘OOOO(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알바’라고 쓴 아이들에게는 진로 지도를 어떻게 해야 하지? 장난을 친 거면 혼내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쓴 영민이(가명)를 불러 물어보니 사뭇 진지하다. 아니,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요새 시급이 얼마이고, 며칠을 일하면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다고 계산까지 내놨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영민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기부(학교생활기록부) 장래희망에 ‘OOOO 알바’라고 적을 순 없지 않나. 영민이는 정말 다른 장래희망은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영민이 앞에 많은 기회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보여줄 어른들이 없는 것은 아닐까.”

서울 동북 지역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중인 A씨의 일기다. 아직 경력 5년 내외의 초보 교사라 이런 경험이 더 난감하다.

교육열 높은 지역 다양한 직업 꿈 #빈곤층 많은 곳은 성취 동기 낮아 #“부모 소득 차이 아이 꿈까지 좌우”

“장래희망? 로또 맞은 남자와 결혼” 

서울 서남 지역의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B씨도 일기에 비슷한 고민을 담았다. 교편을 잡은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다.

“선희(가명) 때문에 너무 속상하다. 장래희망을 물어봤더니 “로또 맞은 남자랑 결혼하는 것”이란다. 그게 중3의 장래희망이라니. “에이, 그래도 어떻게 로또만 보니?”라고 했더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색했다. “선생님, 성격이든 외모든 다른 게 중요해요? 전 진짜 그거 말곤 아무 것도 안 중요해요.”란다. 그렇지 않다고 차분히 설명해도 전혀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선희를 나무랄 수 없다. 선희가 부유한 집 아이였어도 이런 생각을 할까. 다른 학교에 근무하는 동기에게 선희 이야기를 했더니 “나는 ‘돈 많은 남자 세컨드’ 되는 게 소원이라는 학생도 본 적 있다”고 했다. 이 아이들은 대체 어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들은 것일까.”

두 교사의 고민이 맞닿는 지점은 아이들이 접하는 ‘인적·문화적 자본’의 부족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소득 차이는 자녀의 학력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인적·문화적 자본의 격차는 아이들의 꿈까지 좌우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택배 기사뿐인데 그것도 드론이 하면…”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금수저·흙수저론처럼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자녀의 지위도 나뉜다고 할 때 과연 경제적인 부분 뿐이겠느냐”며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서 파생되는 힘, 인맥 등 물려받는 인적 자원에 따라서도 삶이 확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택배 상자를 실은 드론이 지난해 10월 세종시 산업통상자원부 청사 앞 잔디마당에 착륙하고 있다. 이 드론은 1㎞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불과 30초 만에 이동해 노트북 컴퓨터를 무사히 배송했다.  [연합뉴스]

택배 상자를 실은 드론이 지난해 10월 세종시 산업통상자원부 청사 앞 잔디마당에 착륙하고 있다. 이 드론은 1㎞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를 불과 30초 만에 이동해 노트북 컴퓨터를 무사히 배송했다. [연합뉴스]

이는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체감하는 분위기와도 비슷하다. 서울에서 교육열이 높은 ‘교육 특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노원구 중계동의 을지중에서 지난해까지 영어를 가르친 교사 손지선(35)씨는 “학교에서 ‘진로 체험의 날’ 행사를 하면 대부분 학부모가 초청받아 오는데, 정말 다양한 직업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법조인, 외교관, 파일럿, 국제기구 종사자, 또 외국계 은행이 아니라 정말 외국 은행에 근무하는 분들이 온 적도 여러 번 있다. 사실 나도 처음 보는 직업들도 있었다”며 “부모 자체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인적자원”이라고 전했다.

서울 다른 지역 고등학교 교사가 전한 상황은 달랐다. 그는 “드론과 관련한 뉴스를 본 학생이 ‘선생님, 저는 커서 택배기사밖에 못 할 것 같은데 그것도 드론이 하면 이제 저는 뭘 하죠?’라고 정말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35년 경력의 교사 송형호씨는 “꿈을 가지면 이룰 수 있는 게 더 많지만, 지금은 꿈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세대”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성취동기 측면에서 가족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뭐가 돼야 할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2015 사회경제지위 최하위 25% 자녀, ‘서른살 꿈’ 3위는 “모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꿈에 미치는 영향은 통계로도 증명된다.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부교수가 지난해 5월 국제사회학회(ISA) 사회 계층과 이동 연구분과 서울대회에서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한국 청소년의 장래희망 격차 증가’를 주제로 발표한 논문이 그 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시행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만 15세 대상, 3년 주기 실시)에선 ‘서른 살이 됐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싶느냐’는 설문을 진행한다. 변 교수는 이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대답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로 나눠 2006년과 2015년을 비교했다. 국제지표인 직업 지위 점수(ISEI·90점 만점)를 기준으로 환산해 수치화했다. 전문직일수록 ISEI가 높다. 예를 들어 의사 88점, 국회의원 77점, 건축가 및 엔지니어 73점, 경찰관 50점, 미용 관리사 30점 식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006년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최하위 25%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장래희망 점수는 57.5였다. 이에 비해 최상위 25% 그룹의 점수는 64.8이었다. 2015년엔 최하위 25% 그룹의 점수가 51.7인 데 비해 최상위 25% 그룹의 점수는 61.2이었다. 둘 다 하락했지만, 최하위 그룹의 낙폭이 더 컸다. 가뜩이나 작았던 꿈이 더 쪼그라든 것이다.

‘모르겠음’이라는 응답에서도 두 그룹은 차이를 보였다. 최하위 25% 그룹에선 모르겠다는 응답이 2006년 6위(3.1%), 2015년 3위(3.8%)를 차지했다. 하지만 최상위 25% 그룹의 상위 10개 직업 응답 중 모르겠음은 없었다.

변 교수는 “이루기 매우 어렵다 해도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어떤 꿈이든 꿀 수 있는 사회와 자신의 지위에 따라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꿈만 꾸는 사회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사회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때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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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교실이데아 2019] 학부모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를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1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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