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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 충돌 35분전 유람선 받았는데…"후진"만 외친 해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 화물선이 광안대교와 충돌하기 35분 전 유람선을 들이받아 현장에 해경이 출동해 있었는데도 광안대교와 충돌을 막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해경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 화물선 유람선과 1차 충돌 #VTS 선장과 35분간 교신했으나 또 사고 #해경 “2일 선장 구속영장 신청”

1일 부산해양경찰서에 따르면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호’(5998t)가 부산 남구 용호부두를 출항한 시각은 28일 오후 3시 40분. 출항 4분만인 오후 3시 44분 씨그랜드호가 용호부두 내 정박해 있던 유람선을 들이받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28일 오후 부산 남구 용호동 해상에서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 6000톤)이 광안대교와 충돌해 대교 구조물이 일부 파손됐다. [사진 가나안요양병원]

28일 오후 부산 남구 용호동 해상에서 러시아 화물선 (씨그랜드, 6000톤)이 광안대교와 충돌해 대교 구조물이 일부 파손됐다. [사진 가나안요양병원]

부산해경 광안리파출소 연안 구조정은 신고 접수 13분 뒤인 오후 3시 57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해경은 씨그랜드호 선원과 함께 들이받은 유람선과 엉킨 닻을 푸는데 20분가량을 보냈다. 그런데 오후 4시 16분 먼바다로 항로를 변경해야 하는 씨그랜드호가 갑자기 광안대교 쪽으로 운항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해경은 곧바로 씨그랜드호를 따라갔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서 수차례 교신을 시도했다.

씨그랜드호 선장은 VTS에 “배 조종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예인선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고, VTS는 “뱃머리를 돌려라, 후진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2~3분을 허비했다. 결국 씨그랜드호는 오후 4시 20분 광안대교를 들이받았다. VTS는 씨그랜드호가 유람선과 충돌한 오후 3시 44분부터 선장과 광안대교 충돌까지 35분간 교신했다. VTS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 2차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사고 당시 VTS에 근무 중인 직원은 5명이었다.

광안대교 도로 아래부분 찢어진 철구조물.[사진 부산시]

광안대교 도로 아래부분 찢어진 철구조물.[사진 부산시]

이에 부산 해경 관계자는 “용호부두에서 광안대교까지 직선거리가 400m이고, 씨그랜드호의 길이가 110m여서 씨그랜드호의 항로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며 “사고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씨그랜드호 선장에게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씨그랜드호의 운항 속도가 느려 VTS에서 씨그랜드호의 항로가 잘못 됐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며 “운항 좌표에는 씨그랜드호가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찍히기 때문에 35분간 교신했더라도 VTS에서 할 수 있는 조처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씨그랜드호 선장은 사고 당시 혈중알코올농도가 면허 취소 수준인 0.086%로 나왔다. 해상 음주운전 입건 기준은 혈중알코올농도 0.03%다. 해경이 1차 사고 당시 씨그랜드호에 올라타 선장의 운항 능력과 선원의 상태를 확인하고, 출항을 정지했다면 광안대교에 부딪히는 2차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대목이다.

한국해양대 김길수 교수는 “1차 사고 당시 해경이 씨그랜드호에 승선해 선장과 선원의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다”며 “하지만 씨그랜드호는 대형 선박이기 때문에 선장이 사다리를 내려주지 않으면 연안 구조정에 타고 있던 해경이 배에 올라타는 것은 불가능했고, 해경이 강력하게 승선을 요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씨그랜드호의 출항을 해경이 막았어야 했다는 지적에 대해 김 교수는 “사고 당시 바람이 세게 불고 있어 씨그랜호의 닻을 내리고 정지시켜도 배가 흔들려 주변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유람선과 부딪혔을 것”이라며 “출항 금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씨그랜드호에 도선사가 승선해 있었다면 광안대교와 부딪히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광안대교처럼 중요한 교통 인프라가 있는 용호부두에는 도선사를 강제 승선시키도록 법을 바꾸는 게 최선의 대안이다”고 조언했다.

광안대교 사고 현장을 조사 중인 해양경찰. [사진 부산해경]

광안대교 사고 현장을 조사 중인 해양경찰. [사진 부산해경]

씨그랜드호 선원들은 배가 광안대교 방향으로 운항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해경은 씨그랜드호 내 항해기록저장장치와 폐쇄회로(CC)TV를 확보해 분석하는 한편 선장과 1항사, 조타수를 대상으로 수사 중이다. 부산 해경은 “이르면 2일 오전 해상안전법 위반 혐의로 선장의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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