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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겠다...나의 아름다운 사치" 황규백 개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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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백, 'A TREE AND BUTTERFLIES'(2018,캔버스에 아크릴 앤 오일,122*100.7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A TREE AND BUTTERFLIES'(2018,캔버스에 아크릴 앤 오일,122*100.7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행복하다!"
황규백(87)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시작한 그는 "전시를 위해 작업실에서 작품을 다 빼고 텅 빈 작업실을 보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림이 없으니 몸 상태가 이상해져 병원까지 찾아가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난 내가 그린 그림을 온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게 여겨진다. 그림이야말로 내게 끝없이 행복을 준다"고 덧붙였다.

황규백, 'A HOUSE'(2018, 캔버스에 아크릴 앤 오일, 122*102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A HOUSE'(2018, 캔버스에 아크릴 앤 오일, 122*102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현실과 상상 사이

지난해 그린 집 그림('A HOUSE')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작은 창문이 있는 소박한 모양의 집을 화면 가운데 크게 배치한 풍경화다. 단순해 보이는 구도이지만, 한 발짝 다가가보면 벽돌의 질감, 들판의 녹음, 목가적인 마을의 저녁 공기까지 살려낸 섬세한 붓질이 보인다. 고즈넉하지만 쓸쓸하지 않고, 푸른 배경은 신비로운 기운까지 품고 있는 듯하다. 그는 "수도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신성한 공간을 그리고 싶었다"며 "이 그림이 너무 맘에 들어 똑같은 구도로 배경을 달리해 2개나 더 그렸다"며 웃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선보이는 작품은 회화 20점.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부터 미국 뉴욕에서 보낸 30년 등 지난 50년간 판화 작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온 그이지만, 200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후부터 회화 작업에만 주력해왔다.

황규백, 'LANDSCAPE WITH A RED UMBRELLA'(2018,122.8*101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LANDSCAPE WITH A RED UMBRELLA'(2018,122.8*101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CHAIR AND UMBRELLA'(2017, 122.5*100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CHAIR AND UMBRELLA'(2017, 122.5*100cm). [사진 가나아트센터]

내 마음의 풍경 

 붓을 다시 손에 들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정갈한 시(詩)를 연상케 하는 작가 특유의 감성이다. 군더더기를 다 버리고 몇 개의 낱말을 배치해 완성한 시처럼, 그의 그림은 읽는 이에게 풍부한 행간을 선사한다. 특히 창문과 우산, 바위, 시계 등 일상적인 사물을 활용한 독특한 변주가 돋보인다.

 -그림 속 사물들이 꿈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린 적은 없다. 모두 제 상상의 세계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들을 내 상상 속에서 재배치하는 것을 즐긴다. 사람들이 이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읽어주면 좋겠다."

황규백, '남북정상회담(SOUTH AND NORTH SUMMIT,2018, 53*72cm). [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남북정상회담(SOUTH AND NORTH SUMMIT,2018, 53*72cm). [사진 가나아트센터]

 -제목이 '남북정상회담(SOUTH AND NORTH SUMMIT)인 그림도 있더라. 창가에 비스듬히 세워진 우산만 보이는데.
 "여기서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게 바로 판문점 도보 다리다. 지난해 4월에 남북한 두 정상이 도보 다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곳이다. 나는 6·25 때 자원입대해 4년 동안 군에 있었는데, 이날 TV에서 회담 장면을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우산인가.
 "내겐 우산이 사람과 같다. 내 자화상도 우산('AN UMBRELLA')으로 그렸다(웃음). 이 그림 속 우산도 그런 존재다. 창가에 몸을 기대고 저 멀리 도보다리에서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다."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노작가는 평화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이렇게 그만의 언어로 풀어놓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 속 바위와 우산, 그림자는 작가의 분신처럼 읽힌다.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있고, 언제든 바깥세상과 만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사물들은 내부와 외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정물과 풍경 사이에 팽팽한 균형을 잡아주는 균형추 역할까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위든, 우산이든, 벽돌이든 모두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어 낯설고 아름답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박민혜 큐레이터는 " 그의 회화 속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지 않는 단어들이 배치된 시와 같다. 이 사물들은 은유적으로 배치돼 시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황규백, 'A ROCK WITH HAT'(2018, Acrylic and oil on canvas, 122 x 102 cm)[사진 가나아트센터]

황규백, 'A ROCK WITH HAT'(2018, Acrylic and oil on canvas, 122 x 102 cm)[사진 가나아트센터]

이야기는 쉽게, 표현은 세밀하게

 -화면 구도는 대담하고 단순한데, 화면 속 디테일 묘사가 극도로 세밀하다.
 "내가 정성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오랫동안 메조틴트(판화 기법의 하나) 판화를 고집해온 것도 그런 섬세하고 미묘한 표현이 가능해서였다. 회화도 다르지 않다. 벽돌이든 바위든, 풀이든 정성을 다해야 한다. 난 정교하고 치밀한 손작업이 사람을 엄숙하게 한다고 믿는다. 언뜻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내 그림엔 바위의 표면이나 벽돌 하나하나 쉽게 그려진 게 없다. 나는 담벼락을 그리면서도 벽돌 하나에 공을 들이며 엄청난 사치를 누린다. 아름다움이라는 사치다. 그런 점에서 난 사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웃음)."

 -전시 준비는 어떻게 했나.
 "매일 오전 7시에 작업실에 가서 오후 6시까지 일한다. 겨울엔 어두워질 때 집을 나가서 어두워진 후에 돌아온다(웃음)."

 그림으로 살고, 그림으로 죽겠다

 -그 정도면 젊은 사람에게도 벅찬 일정이다.
  "아직은 괜찮다. 난 작업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심심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을 붙여서 보면 그게 낙원이다. 삶에서 가능하면 기쁨을 많이 찾으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가 화가라는 직업을 잘 선택했구나 싶다. 죽는 날까지 붓을 놓지 않을 작정이다."

 서울 방배동에서 아내와 함께 사는 작가는 "나는 그림으로 살다가 그림으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며 "그림은 내게 보배이자 행복이다. 여러분도 함께 보고 즐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가의 회고전을 준비했던 양옥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황규백 작가는 1970년대에 이미 MOMA와 브리티시 뮤지엄, 알베르티나 뮤지엄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될 만큼 굉장히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작가"라며 "그의 작품은 미묘한 색조 변화와 섬세한 디테일을 담은 조형세계를 살펴보는 즐거움을 준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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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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