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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자 뒤샹…100년 전 세상을 뒤집은 그 유명한 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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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의 작품. 1917년 원본의 복제품인 ‘샘’(195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의 작품. 1917년 원본의 복제품인 ‘샘’(195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뒤집고 또 뒤집어라’ ‘너 자신의 틀을 깨부숴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회고전 #자전거바퀴·병걸이 등 150점 나와 #기성품 매만진 ‘레디메이드’ 아트 #미술 상식에 대한 도전장 던져 #“여자가 되볼까” 제2의 분신 설정 #작품 축소품 만들어 상자에 보관 #“현대미술 전개에 지대한 영향”

‘현대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평생 자기 자신에게 한 주문이다. 프랑스 북부 도시 루앙에서 태어난 뒤샹은 25세에 이미 화가로 성공했지만, 바로 그때 이렇게 결심했다. “마르셀, 그림은 더는 아니야, 일자리를 찾자.” 그것은 뒤샹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선언이었고, 앞으로는 그림을 생계유지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미술사에서 ‘예술’의 정의를 바꿔버린 사건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미술관에서 뒤샹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하는 ‘마르셀 뒤샹’전이 개막했다. 세계에서 뒤샹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협업해 여는 전시로, 뒤샹의 회화와 드로잉, 레디메이드 작품 등 150여 점을 선보인다. ‘현대미술의 거장’인 뒤샹에 대한 많은 궁금점과 수수께끼를 풀어볼 흔치 않은 자리다.

이번 전시에선 뒤샹의 대표작 ‘샘’도 공개됐다. 1950년 뒤샹이 서명한 복제품이다. 뒤샹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 ‘샘’의 충격은 가신 지 오래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뒤샹이 남기고 간 예술적 유산을 제대로 살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판의 규칙을 완전히 바꾼” 천재 아티스트의 복잡하고 대담했던 머릿속을 유영하듯 뒤샹의 세계를 탐험할 기회다.

25세에 회화와 결별했다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전 관장은 “현대미술에서 뒤샹은 서양철학의 플라톤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뒤샹 이후에 예술은 그 전과 같을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뒤샹 이후의 모든 현대미술은 아이디어 자체가 매우 중요한 ‘개념미술’이 되었기 때문이다.

뒤샹이 23세에 그린 '의사 뒤무셸의 초상'(1910, 캔버스에 유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뒤샹이 23세에 그린 '의사 뒤무셸의 초상'(1910, 캔버스에 유채).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셀 뒤샹의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 캔버스에 유채). 뒤샹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의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 캔버스에 유채). 뒤샹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 반란의 여정을 작품 변화에 따라 총 4부로 나누어 보여주는 전시는 1부부터 매우 흥미롭다. 10대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뒤샹이 인상주의, 상징주의, 야수파 등 당시 다양한 화풍을 섭렵했음을 보여준다. 스무 다섯살의 뒤샹에게 처음 명성을 가져다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 2)’도 볼 수 있다.

뒤샹은 이 작품을 1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회에 출품했다가 심사단이 작품의 몇 부분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림을 수정하는 대신 작품을 거둬들였다. 이듬해 이 작품은 뉴욕 아모리 쇼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예술은 아이디어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2년 무렵 뒤샹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파리항공전시에서 충격을 받았다. 금속성의 항공기, 거대한 엔진과 프로펠러의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한 뒤샹은 “회화는 이제 끝났어. 저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것을 누가 만들 수 있겠어?”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뒤샹은 12년 ‘자전거 바퀴’를 내놓았고, 17년 뉴욕 독립예술가협회가 여는 전시에 남성용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출했다. 미술에 대한 상식에 정식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예술은 이제 붓질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돼야 한다고 믿게 된 뒤샹은 “예술은 망막적인 것을 넘어서 아이디어(개념적인 것)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지회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미술사에서 생각이 작품의 근원이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말했다.

뒤샹의 여성 자아, 에로즈 셀라비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1921, 만 레이).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1921, 만 레이).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20년대부터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과 함께 작업했다. 뒤샹은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를 이렇게 소개했다. “셀라비는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났어. 성전환한 거야….” 그녀는 다름 아닌 뒤샹 자신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뒤샹의 또 다른 자아, 즉 여성 자아였다. 뒤샹은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1890~1976)와 함께 그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뒤샹이 여자처럼 화장하고 가발을 쓰고, 모자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다. 이지회 학예연구사는 “뒤샹은 성이든, 인종이든 주어진 정체성을 벗어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아티스트였다”고 말했다.

 “내 작품은 너무 소중해”

마르쉘 뒤샹 '여행가방 속 상자'(1941년 에디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마르쉘 뒤샹 '여행가방 속 상자'(1941년 에디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작품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하고 있는 유일한 뒤샹의 작품, ‘여행가방 속 상자’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역대 최고액(약 6억원)에 사들인 작품이다. 뒤샹이 자신의 중요한 작품을 미니어처 복제품으로 만들어 전시용 상자에 담은 이 작품은 이른바 ‘종합선물상자’ 같은 작품이다. 뒤샹은 상자를 300여 개 제작했고, 포맷과 디자인, 색상 선정에 직접 관여했다. 뒤샹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매슈 애프런 필라델피아미술관 큐레이터는 “뒤샹은 항상 자신의 예술적 예산을 정리하고 관리·보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자신의 작품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 오랜 기간 후원자였던 컬렉터 아렌스버그 부부가 50년 필라델피아미술관에 기증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덧붙였다.

사후 깜짝쇼까지 기획

'11번가 작업실의 '에탕 도네''(1968).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1번가 작업실의 '에탕 도네''(1968).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뒤샹은 마지막까지 아티스트였다. 거의 은퇴했다고 여겨지던 시기에도 그는 남몰래 대작을 만들고 있었다. ‘에탕 도네’란 작품이었다. 불어로 ‘주어진 것’이란 뜻의 ‘에탕 도네’는 하나의 방 크기로 구성한 디오라마(여러 모형을 배경과 함께 설치) 작품이다. 낡은 나무 문에 난 두 개의 구멍으로 관람객이 들여다보면 벌거벗은 여성이 풀숲에 누워 손에 램프를 들고 있고, 그 뒤에 실제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폭포 등이 보이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진다.

세상을 떠나기 전 이 작품의 존재를 알았던 사람은 단 네 명이었을 정도로 뒤샹은 이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했다. 작업을 완성한 뒤엔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비밀을 지킬 것', 그리고 '죽은 후에는 필라델피아미술관에 기증할 것' 등의 두 가지 조건을 내걸고 친구에게 팔았다.  이번 전시에선 이 ‘에탕 도네’를 디지털 영상으로만 소개한다.

티모시 럽 필라델피아미술관장은 “뒤샹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놀랍고 영향력이 큰 작가”라며 “뒤샹을 이해하지 않고는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다. 뒤샹의 업적이 새로운 관객과 만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전시는 2019년 4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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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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