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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퍼지는 100년 전 ‘대한독립만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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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전 그날’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제 10, 12 옥사에서 19일 개막된다. 4800여명의 일제 주요 감시대상 중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의 1000명의 인물카드가 터널 모양으로 전시돼 있다. [뉴시스]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전 그날’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제 10, 12 옥사에서 19일 개막된다. 4800여명의 일제 주요 감시대상 중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의 1000명의 인물카드가 터널 모양으로 전시돼 있다. [뉴시스]

이것은 설정이 아니다. 높고 차가운 붉은 벽돌 담벼락 안, 칼날처럼 날카로운 2월의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방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좁고, 격자로 쇠창살을 두른 한뼘 두께의 문은 몇겹의 잠금장치를 두르고 있다. 서울 통일로에 자리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10옥사와 12옥사는 이렇게 뼈아픈 이야기를 품고 웅크리고 있다.

항일문화유산 56점 한자리 모여 #매천 황현의 안중근 기록 첫 공개 #소설가 심훈의 옥중편지도 뭉클 #유관순 등 4857명 수형카드 모아 #이육사 친필원고, 김구 유묵 눈길

옥사 내부, 이곳의 지붕은 지붕이 아니고, 방도 방이 아니다. 차라리 거대한 냉동고에 가깝다. 겨울엔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곳, 여름엔 ‘똥통이 끓었다’는 지옥 같은 곳. 하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수형 기간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이들이 적잖았다.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된 청년 심훈(1901~1936)도 그들 중 하나였다. 심훈은 그해 8월 29일 이곳에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심훈은 이어 “(제가)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시라”며 “어머니께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전을 19일부터 연다. 그동안 발굴해온 항일독립 문화재 등 항일 문화유산 56점을 함께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 전시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거쳐 간 고통의 현장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죽음을 불사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이들의 숨결이 공간에 절절한 이야기로 스며들어 100년 전의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황현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남긴 ‘절명시’. [사진 문화재청]

황현이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남긴 ‘절명시’. [사진 문화재청]

◆황현의 친필 절명시(絶命詩)=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의 유물들이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 역사가이자 시인인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전남 구례 월곡마을 그의 집에서 자결하며 시를 남겼다. 바로 ‘절명시’다.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발의 나이에 이르도록/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네/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의 가물거리는 촛불 푸른 하늘 비추누나(…)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역사를 돌이켜보니/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구나….”

황현은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여기지 않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했다.

 황현의 유물 『사해형제』와 『수택존언』. 『수택존언』에는 매천이 스크랩한 당시 항일 투쟁 관련 기사들이 들어있다. [사진 문화재청]

황현의 유물 『사해형제』와 『수택존언』. 『수택존언』에는 매천이 스크랩한 당시 항일 투쟁 관련 기사들이 들어있다. [사진 문화재청]

정인양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사무관은 “이번 전시에선 황현 선생의 후손들이 100년 넘게 소장해온 친필 유묵을 최초로 공개한다”며 “절명시가 들어간 『대월헌절필첩』을 비롯, 매천의 유묵첩 『사해형제』, 안중근 의사의 재판 관련 자료를 모은 『수택존언』 등을 선보인다”고 말했다.

『사해형제』에는 황현의 순국을 애도하며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쓴 시 ‘매천선생’이 수록돼 있다.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한용운이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한 뒤 전국 유명 사찰을 순회하며 강연했다”며 “구례 화엄사에 갔을 때 황현의 동생을 만나 이 시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황현의 유물은 보존 처리가 안 돼 있어 이번 전시에선 복제본으로만 선보인다.

황현이 남긴 신문 스크랩북인 『수택존언』도 눈여겨봐야 한다. 황현이 안중근 의사 공판 기사와 안 의사가 의거 전 남긴 시를 꼼꼼하게 수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유관순 의사의 신상을 기록한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 카드. [사진 문화재청]

유관순 의사의 신상을 기록한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 카드. [사진 문화재청]

◆일제 수형기록 카드=이번 전시에선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수형기록카드)도 대거 공개된다. 10옥사의 방 하나와 복도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던 인물 4857명에 대한 신상 카드로 채워 공개하는 것. 이정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학예사는 “이번 전시에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황해도·함경도 등 북한 지역 수감자와 여성 수감자의 활동 상황도 소개한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의 친필 원고. [사진 문화재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의 친필 원고. [사진 문화재청]

지난해 등록문화재 제713호와 제738호가 된 이육사(1904~1944) 시인의 친필원고 ‘편복’과 ‘바다의 마음’도 공개한다. ‘육사’의 본명은 이원록. 1926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투옥됐을 당시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해진다. ‘편복’은 이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이번 전시에선 원본으로 공개된다.

최근 등록문화재로 예고된 이봉창(1900~1932) 의사의 선서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조소앙(본명 조용은·1887~1958)이 쓴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등록문화재 제740호), 백범 김구가 쓴 붓글씨,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가장 오래된 원본 광복군가집인 『광복군가집 제1집』도 볼 수 있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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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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