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술 삐죽, 엉덩이 살랑
공연 초반 호응은 다소 적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뼈대만 남은 채 요정이 도깨비로 둔갑하고, 남녀의 성(性)역할이 뒤바뀐 설정에 다소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톡톡 튀는 입담이 자막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관객의 눈은 살아있는 몸짓이 아닌 죽은 문자에 멈춰선 듯 보였다. 한국에서의 폭발적 반응과는 전혀 다른 어색함이 한동안 흘렀다.
극단 여행자는 2002년 초연 이후 일본.폴란드는 물론 쿠바.콜롬비아 등 전세계를 상대로 '셰익스피어를 팔아 온' 코스모폴리탄 극단이다. 중반을 넘기면서 객석이 달라졌다. 특히 바람둥이 가비의 천연덕스러움과 오줌을 얼굴에 척척 바르는 노파의 걸죽함이 로맨스로 이어지자 객석 이곳저곳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간간이 내뱉는 영어 대사에도 손뼉을 쳤다. "극을 처음 만들 때부터 세계 무대를 염두에 뒀다"는 양정웅 연출의 말처럼 관객은 더이상 낯선 한국어를 따라가지 않았다. 살랑대는 엉덩이, 삐죽대는 입술,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이단 옆차기에 환호했다. 한때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전용 극장이었던, 엄숙한 극장은 한국의 놀이마당이 돼 버렸다.
# 언어를 넘어 이미지로
객석 80% 가량을 채운 관객의 반응은 다양했다. 학생 20여 명과 함께 왔다는 한 교사는 "셰익스피어 연극을 한다고 해서 왔는데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과 꼭 다시 오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20대 여성 관객은 "퇴장한 배우들이 무대 뒤편에서 북.장구 등을 연주하는 게 신기했다. 아마 죽은 셰익스피어도 이 무대를 보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프레이 틸잰더란 관객은 "한국적 색채엔 박수로 보내고 싶다. 그러나 지나치게 '재미'란 해석에 집착해 중첩되고 균형감있는 원작을 다소 훼손시킨 것 같다"는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한여름…'의 바비칸에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페스티벌에서 받은 호평 덕분이다. 바비칸 센터 루이즈 제프리스 예술감독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언제나 '언어'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말의 무거움을 훌훌 털어버린 에너지와 율동만으로도 셰익스피어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마리아 쉐프쇼바 교수(런던대 연극과)는 "지금껏 봐온 한국 연극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왔으나 이 작품은 동시대의 젊은 생기가 넘쳐 좋았다"고 말했다. 바비칸 센터는 11월엔 오태석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초청한다. 셰익스피어의 한국식 변용이 세계를 향해 돛을 올리고 있다.
런던=최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