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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포럼

리센코의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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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소련의 초기 농업 생산성은 엉망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의 격렬한 내전으로 농지는 황폐해졌다. 식량 증산이 최대 과제였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는 이 시대의 요구에 편승했다. 밀의 씨앗을 낮은 온도로 처리해 얻은 씨앗을 뿌리면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미추린 농법(한랭 농법)을 개발한 생물학자다.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이론은 멘델 등의 유전법칙을 완전히 뒤집었다. 당시 스탈린도 유물론적 변증법에 기초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소비에트형 인간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코드가 척척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리센코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농법은 전국에 보급됐다.

리센코의 이론은 실험 결과를 조작한 허구다. 밀의 수확량이 늘어날 리 없었다. 그의 이론을 의심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정치 성향과 당성을 의심받아 숙청됐다. 실제보다 수확량을 부풀려 보고하는 아첨꾼이 늘어났다. 기존의 유전학.식물학은 '부르주아 과학'으로 비판받아 연구소들이 폐쇄됐다. 앞서가던 소련의 농생물학은 리센코주의에 발목이 잡혀 30년 이상 엉뚱한 길을 헤맸다. 농업은 돌이킬 수 없이 황폐해졌다. 과학자들이 리센코의 이론을 바로잡은 것은 스탈린이 죽은 지 한참 뒤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을 싸잡아 '교조주의'라고 비난했다. "저항 없는 개혁은 없다"고 했다. "부동산.교육 개혁과 관련해 '교조적 논리'로 정부 정책을 흔드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이다. 며칠 전 국무회의에서는 "독선과 아집, 그리고 배제와 타도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선거 민심은 차치하자. 여당 의원들마저 현 정부의 정책 실패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마당에 독선과 아집이라니,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교조주의는 '특정한 권위자의 교의(敎義)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생각'이라고 한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과학을 정치의 시녀로 만들고, 농민을 굶주리게 만든 리센코주의 같은 것이다. 권력자의 코드와 맞지 않다면 소신도 현실도 모두 팽개치는 사람들이다.

교조적 이념은 세상 일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현실 세계를 탐구하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밀의 수확량 통계나 시장의 흐름은 이론에 맞도록 권력으로 조작하면 된다. 교주의 말은 현실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북한 정권은 우리 민족이라고 단정하고 나면 모든 문제에 해답이 나온다. 돈이 많으면 놀부, 가난하면 흥부라고 설정하고 나면 경제 정책도 쉽게 정리된다. 수확량이 적어도 리센코의 잘못이 아니다. 농부가 게으른 탓이라고 떠넘기면 그만이다.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은 노무현 정권이 인기가 없는 이유를 "재미없는 정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는 좋아지고 있는데 민생이 문제"라는 것이다. 민생이 어려운 건 과거 정권이 잘못한 환란 후유증 때문으로 임기 중에는 세종대왕이 와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다. 경제가 좋은데 서민의 살림살이는 고단한 경우도 있는가. 잘한 건 이 정부의 치적이고, 나쁜 건 과거 정권의 탓일 수도 있는가.

리센코는 자기 이론을 믿었을까. 아니면 권력의 수단으로만 여겼을까. 어느 쪽이었건 수확량은 줄어드는데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고통을 짊어진 건 농민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리센코들이 설친다. 의심하면 적으로 몰아 공격한다. 권력자가 독선에 빠져 있는 한 리센코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권력이 몰락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