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총탄세례에 호텔벽·유리박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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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월 중순「후야오방」(호요방)중공당 전총서기가 사망한 직후부터 50여일에 걸쳐「북경사태」를 현장에서 취재해온 본사 박병석 특파원이 지난 10일 북경을 떠나 홍콩에 도착했다.
다음은 천안문대학살의 현장취재에서 위기를 겪기도 했던 박특파원이 보내온 북경취재기다.
10일 오후(한국시간)북경발 홍콩행 중국민항(CAAC)이 카이탁 홍콩 국제공항 활주로에 바퀴를 내딛는 진동과 둔탁한 소리를 듣고서야 그동안 쌓였던 극도의 긴장 관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3일밤과 4일새벽에 걸치는「피의 대학살」이후 북경의 일주일은 참담했다.
이미 이성과 질서를 잃은 북경은 무정부상태에 빠졌으며 온거리는 생과 사의 운명이 교차하는 암흑이였다.
4일 계엄군과 시민들과의 충돌현장을 취재키 위해 북경 천안문에서 7km떨어진 동직문을취재할 때부터 모골이 송연한 위험에 직면했다.
이날 오후 10시쯤. 심양군구에서 출동한 계엄군이 천안문을 향해 진격중 동직문에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군트럭 2대와 지휘차로 보이는 군지프가 화염속에 굉음을 내고 있었다. 또다른 군트럭 2대와 몇명의 군인들이 시민들에 포위돼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미 거리에는 차량의 통행이 끊겼으나 운전사를 설득, 봉고차로 현장에 도착한 기자는 불꽃을 날름거리는 군트럭과 군지프를 카메라에 담았다.
몇장을 찍고 돌아서는 순간 억센손이 기자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뭐하는 자인가?』
활활타는 군트럭의 불꽃에 비친 20대 초반의 험상궂은 청년의 얼굴에는 심상치 않은 눈빛이 이글거렸다.
『예, 홍콩에서 온 기자입니다.』
『너, 공안국에서 온 가짜 기자지. 신분증을 내놔.』
주위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자를 둘러싸는 것이 보이는 순간 본능적인 공포감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신분증을 꺼내려고 했으나 겁에 질린 탓인지 명함지갑 속에든 신분증이 잘 찾아지지 않았다.
『이자식 ○○사(중국의 관영보도기관)에서 나온놈 같다』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옆에 있던 현지인 운전사도 공포분위기에 눌렸기 때문인지 한마디 거들어 주지도 않았다.
홍콩외신기자클럽회원 신분증을 확인한 억센 손의 20대 청년이『맞다. 홍콩기자』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저기서『우리는 외국기자를 환영한다. 외국 신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짐짓 태연한채 했으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계엄군의 이동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천안문으로 통하는 동장안가의 호텔에 투숙한 기자는 계엄군들의 동정을 볼 수 있다는 이점의 대가로 극도의 위험을 감수해야했다.
「가짜 기자」로 몰려 위험을 당했던 당일 자정쯤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3륜차로 천안문을 향하다 또 한차례의 위기를 맞아야했다.
탱크와 장갑차의 호위속에 이동하는 군트럭에서 갑자기 총탄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기자주위에 스치는 총탄사이로 포복으로 도망치던 것은 차라리 한 순간이었다.
밤낮없이, 특히 자정무렵부터 기자가 투숙한 호텔에서 불과 10m도 안되는 동장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탱크·장갑차 소리와 고층건물군을 통과하면서 위협용으로 쏘아대는 총탄세례에 기자가 투숙한 호텔의 벽, 가로등, 객실유리가 박살나고 몇 명이 쓰러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도 군이동 상황을 확인, 사태의 흐름을 나름대로 해석해야만 했다.
호텔투숙객들이 6∼7일 비상전세기 등으로 북경을 탈출해 4백20여개 객실중 20여명의 투숙객들만 남자, 호텔총지배인은 남아있는 손님(대부분 기자)들을 위해『영원히 기념될 날』을 위한 칵테일 파티까지 베풀어주었는데 그중 한 서양손님이 비디오 카메라로 파티(?)에 참석한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을 담는 것이 마치 마지막 생의 모습을 담는 것 같아 신경이 거슬렸다.
때없이 날아드는 유탄을 피하려고 기자는 방에 있는 탁자와 의자, 심지어는 트렁크까지 옮겨 장안가쪽 유리창문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침대에서 총소리가 나면 피하는 훈련까지 해야했다.
『마지막 전세비행기』『모든 중국내 미국시민은 가장 빠른 시일내 중국을 떠나라』『절대 외출금지』라는 경고문이 호텔로비에 붙어있을 때도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특히 계엄군과 반계엄군이 대치하는 것으로 알려진 6∼7일 이틀간은 호텔측에서 방공호대피요령 등에 관한 안내서를 방마다 돌렸고 6층 이상 손님을 모두 아래층으로 옮기도록 했다.
만약 내전이라도 되는 날이면 불과 4백m남짓 떨어진 건국문밖에 포진한 탱크·전차의 포격이 호텔까지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경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홍콩기자들과 북경주재 한국인(한국상사지점장)들이 6일 북경을 탈출한데 이어 서로 위안을 나누던 한국특파원을 마저 8일 오전 전원 철수하자 혼자 남은데 따른 긴장과 공포가 수면부족과 함께 극도의 불안으로 죄어왔다.
즉시 출국하지 않으면 『파면』시키겠다던 본사와 홍콩 한국총영사관의 강력한 철수권고를 받아들였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것은 결국 기자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10일 북경의 마지막 한국인이었던 기자가 북경공항을 떠날 때는 이미 중국정정의 대세는 결정됐으며 북경은 질서를 되찾고 있었다.
북경·서울·홍콩의 긴밀한 협조 속에『조자양총서기·호계립정치국상무위원 체포·구금』보도가 AP 등을 8시간 앞지른 것과『성도에서도 사상자-지방으로 확산』이라는 특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값진 수확이자 행운이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밤낮없이 협조해준 북경과 홍콩의 친구들에게 감사 드린다. 재견(안녕) 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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