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26. 마흔셋 유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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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필자는 일본 유학 때 시간이 나면 혼자 우에노공원을 찾곤 했다.

1975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나이 마흔셋의 만학(晩學), 그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공항에서 나는 해묵은 사진을 꺼내보듯 잠시 미국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일본에서 펼쳐질 미지의 삶에 가슴이 설렜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요즘처럼 양국 간 교류는 원활하지 않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낯설었다. 이렇게 내 인생의 새 지평을 연 일본 유학은 시작됐다.

도쿄(東京) 이케부쿠로(池袋)의 값싼 비즈니스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집을 얻거나 하숙할 생각도 했지만, 비용이 월 10만 엔 남짓이어서 호텔과 맞먹었다. 세탁이나 방범 문제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곳이 싸게 먹혔다.

패전 후 일본의 발전과 저력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다. 비포장도로가 많았던 한국에 비해 일본 거리는 잘 정비돼 깨끗했다.

친절과 예의가 일본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어느 날인가 전철에서 내가 일본여성의 발을 밟았는데, 그녀가 오히려 나에게 "스미마셍(미안합니다)"하는 게 아닌가. 발이 아파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어쩔 줄 몰라 한 적도 있다.

우에노(上野)공원에서 새벽 산책을 할 때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10여 명의 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식 영어로 '보란치아'(volunteer)라는 자원봉사자였다. 당시 한국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일본의 의료 수준 역시 우리나라보다 월등했다. 61년부터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었다. 또 73년부터 70세 이상에겐 노인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됐으니, 얼마나 부러웠던지. 우리나라는 63년 의료보험법을 제정하고도, 전 국민이 의보혜택을 받는 것은 89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그 무렵 일본 정부는 모든 현(縣)에 의과대를 둔다는 목표로 의학부 신설을 장려하고, 의사 수도 늘리고 있었다. 이런 일본을 보면서, 의료 취약지에서 의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고국의 환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도쿄여자의과대와 그 학교를 세운 요시오카 야요이(1871~1959)라는 여의사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일본 유학 덕이다. 일본 개화기의 '신여성'이라고 할 요시오카는 1900년 모교인 제생학사에서 여학생을 안 뽑는 데 분노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내걸고 여자의대를 세웠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출산 과정까지 제자들에게 '실습용'으로 보여주는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 결과 도쿄여자의대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의대로 자리 잡았다. "환자를 대할 때는 지극한 정성, 즉 지성(至誠)과 사랑으로!"라던 요시오카의 좌우명은 유학기간 줄곧 내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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