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암투 강경파승리로 일단락|진정국면에 들어선 중국의 앞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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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는「마오쩌둥」 (모택동) 의 지론이 옳았음이 또 한번 입증됐다.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군사위원회주석「덩샤오핑」 (등소평) 이 9일 권부의 밀집지역인 중남해에서 북경일대에 출동한 군지휘관들을 접견, 「반혁명포난」 이 진압된것을 선언함으로써 그동안 사태해결방법을 둘러싸고 궁정내부에서 전개된 치열한 권력투쟁이 군부다수의 지지를 얻은 강경· 원로 제휴파의 승리로 굳어졌음을 과시했다.
등은 특히 「극소수 반혁명폭란」 (폭란은 폭동보다 강한 의미) 분자들이 공산당을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뒤엎으며 중국정부를 전복,부르좌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고 규정함으로써 이번 사태에 관련된 「극소수」를 단호히 처벌할 것을 분명히 했다.

<지식인역할 한계에>
지난4월15일 「후야오방」(호요방)전총서기 사망을 계기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부패척결과 언론자유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시위 단계에서 범민중적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되고 이어「자오쯔양」 (조자양) 총서기, 「후치리」 (호계립)등 개혁·온건파의 실각,계엄령선포,20여만명의 군투입,유혈진압등으로 확대되어 왔다.
이같은 사태의 대처과정에서 군권을 쥔 등소평·양상곤·이붕등 강경보수파와 「천윈」 (진운)·「리셴녠」 (이선념)·「펑전」(팽진)·「왕전」(옥진)등 원로들의 연합세력이 조자양을 대표로하는 온건· 개혁파를 완전제압하는 형세로 중국지도부를 개편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전국에 방영된 북경의 중앙TV가 등소평의 계엄군 지휘관접견 이후에도 7개군구중 북경등 5개군구와 제2포병대 (미사일부대) 지지표명만을 되풀이함으로써 아직 성도군구와 난주군구의 동향이 의문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일단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궁정속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된후에 따르는것은 「극소수 반혁명폭란」 주동자및 배후인물에대한 광범위한 검거·처벌선풍이다.
중국당국은 표면에 나타났던 학생운동지도자는 물론 지식인·언론·문화계인사들및 학생운동을 이용하려했던 소수의 「음모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검거에 이미 나서고 있다.
계엄당국은 북경대·청화대등 대학에 이어 9일에는 정부의 싱크탱크역을 하면서 「이붕타도」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회과학원을 포위,자유화 시위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검거의 표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과학원은 이번 민주화운동의 사상적·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체제비판에 앞장섰던 정치학자 「유엔지아치」(엄가기) 는 물론 「후성」(호승)원장등 주요간부가 민주화운동에 지지서명을 해 당국의 탄압을 받게됐다. 8일자 문회보는 엄가기, 전인대 (국회)상무위원회회의 개최를 추진했던 「차오주언위앤」(조은원) 사회발전연구소장등을 포함한 지식인들이 행방불명됐고 노동자단체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조자양·호계립은 체포,구금됐으며 조의 측근인 「바오통」 (포삼)등도 이미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같은 결과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한계를 또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지식인들의 권력에대한 면종복배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북경시정부와 계엄부대 지휘부는 8일밤 제10호통고를 통해 「북경시 대학생자치 연합회」「수도노동자 자치연합회」 등 학생·노동자의 비합법 조직의 지도자들을 반혁명폭란의 주모자로 단정하고 자수·신고를 촉구했으며, 9일밤에는 제12호 통고를 통해 대자보·소자보·전단살포등을 금지하는등 전국적인 강압조처를 실시했다.

<양이 등직위 이을듯>
한편 등소평은 자신의 양팔격인 호요방·조자양을 스스로 제거한후 군부 및 원로들과의 제휴를 통해 이번 사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군부강경세력과 원로 보수세력에대한 지분을 분배하지 않을수 없게됐다. 이는 등의 권력기반 약화로 연결될 소지가 있다.
이에반해 이번 사태를 통해 양상곤의 대두가 크게 두드러지며 등 이후 중앙군사위주석을양이 맡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또한 9일 방영된 등소평의 계엄지휘관 접견때 양의 이름이 등에 이어 두번째로 나왔으며 계엄지휘부와의 기념사진 촬영에서도 등·양·이붕순으로 앉은것은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관측통들은 온국민의 불만의 표적이 된 이붕수상이 중도 하차할 것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으며 그만큼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는 전망으로 보인다.
새로운 중국의 권력구조는 당총서기에 「차오스」 (교석) , 수상에 「야오이린」 (요의림) , 중앙군사위주석에 양상곤이라는 전망이다. 이는 이붕의 중도하차를 전제로한 것이나 이수상은 8일에도 『당중앙과 국무원을 대표하여 계엄군을 격려,실세임을 과시하고있다.
그러나 등소평이 군부와 당원로의 의견을 중시한 인사개편을 한다해도 보수강경일색으로 일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온조화 인사전망>
이미 호요방과 조자양등 온건개혁파를 제거하지 않을수 없었던 등소평은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의 지속을 위해서도,또 당중앙위등에 상당수의 개혁주의자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인사는 바람직하지 않다. 뿐만아니라 당원로와 군부의 제휴는 부득이한 것이었으며 당원로란 사실상 등의 목을 조르는 부담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조각이되던 실권을 쥐고있는 등소평을 중심으로한 원로들이 살아 있는한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는 어러울 것이다.
중국의 직재상 행동반경이 극히 제한돼 있음을 호·조 두 총서기의 잇단 실각이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미 85세에 이른 등사후의 권력투쟁과 80대에 이른 당원로들의 사후 정국방향이 더욱 심각한 국면을 맞게될것이며 역시 군부의 향방이 관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아래 민중의 의사가 어떤위치에 있는지 드러났으며 등소평이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폭의 개혁·개방론자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보수주의자임을 재확인했고 개혁중국의 한계가 여기에 비롯되고 있음도 입증됐다.
등소평도,이붕도 개혁·개방정책이 계숙될 것이라고 거듭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중국지도층 누구도 개혁·개방을 부인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이번의 사태가발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파 (온건개혁파)의 개혁·개방이 개혁파(급진개혁파) 의 그것과는 다르다는사실이 재차 음미돼야겠다.
또한 이번 사태발생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부정부패·소득격차·인플레등 경제정책의실패에 있으며 이에대한 상당한 책임이 조자양,나아가서는 등소평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수원로파들의 권력회귀현상은 앞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작업이 속도나 폭에있어 미약해질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는 중앙통제및 계획경제가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91년부터 3년간은 중국의 외채상환이 최고조에 달하는 어려운 시기를 맞고있는데다 기술·자본의 도입을 소련에 의존한다고해도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중장기적으로 서방과의 경제협력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한중관계 지속예견>
강경·보수연합세력의 대권장악은 그동안 착실히 발전돼온 한중관계에도 다소 부정적인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발전 속도가 문제될뿐 기존의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무역대표부 개설협상등은 중국정부의 조각이 끝나고 안정될때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으며 문제는 중국정정불안이 우리의 대중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 있다.
한국의 대중투자는 일단 관망 자세로 가겠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은 막을 수 없으며 특히젊은 세대일수록 적극적 이라는점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북경=박병종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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