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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나라당 떠오르게 하는 민주당의 '성창호 공격'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월 20일 'PD수첩 광우병 보도' 1심 무죄 판결이 내려진 뒤 취재진에 둘러싸여 퇴근하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모습. 이 전 대법원장은 이날 아침 한나라당의 사법부 공격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을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중앙포토]

2010년 1월 20일 'PD수첩 광우병 보도' 1심 무죄 판결이 내려진 뒤 취재진에 둘러싸여 퇴근하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모습. 이 전 대법원장은 이날 아침 한나라당의 사법부 공격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을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중앙포토]

"정권이 교체되니 공수만 바뀌었지 사법부를 공격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그때와 똑같네요"

여당, 판결 유불리 따라 사법부 흔들어 #2010년 '강기갑·PD수첩' 무죄에 #한나라당 "사법개혁 반드시 필요" #민주당, 김경수 유죄에 "사법적폐 청산"

법조계에선 김경수 경남지사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사법부와 재판장인 성창호 부장판사를 비난하는 민주당에 실망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조금은 다를 줄 알았는데 '그때' 한나라당의 모습과 똑같다는 말도 들린다.

그들이 말하는 '그때'란 9년 전인 2010년을 가리킨다. 당시 대법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이용훈 대법원장, 집권 여당은 과반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이었다. 보수 대통령과 여당이 지난 정부가 임명한 대법원장과 어색한 동거를 했던 시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막 3년차를 맞은 2010년 1월. 사법부가 2009년 미네르바 사건에 이어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공중부양 사건''PD수첩 광우병 보도' 등에 무죄 판결을 내놓자 한나라당은 이 대법원장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2010년 1월 20일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최고, 중진 회의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는 모습. 한나라당은 당시 시국 사건에 잇달아 무죄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중앙포토]

2010년 1월 20일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최고, 중진 회의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는 모습. 한나라당은 당시 시국 사건에 잇달아 무죄 판결을 내렸던 사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중앙포토]

조해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특정 세력이 장악한 법원에 대한 국민적 개혁이 불가피하며 국회도 대대적인 사법부 개혁에 나설 수 밖에 없다"는 강도높은 논평을 발표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당내 사법제도개선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두 달 뒤 변호사 출신을 포함해 대법관을 24명으로 증원하는 사법개혁안을 내놓았다.

지난달 30일 김 지사에 대한 유죄판결 뒤 민주당이 "사법 적폐의 보복 판결"이라 규정하며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사법 개혁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모습은 당시 한나라당의 패턴과 거의 유사했다.

정권이 교체되며 한나라당(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이 공수 교대만 했을 뿐 판결의 유불리에 따라 사법부를 공격하는 정치권의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김현 대한변협 회장은 "정치인들은 판결의 유·불리에 따라 사법부를 공격하는 안좋은 습관을 갖고 있다"며 "입법권을 지닌 여당의 비난은 실제 사법부와 판사 개개인에게 상당히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댓글조작 혐의로 기소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 호송버스로 걸어가고 있다. 김경록 기자

댓글조작 혐의로 기소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 호송버스로 걸어가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하지만 설 연휴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김 지사의 판결을 비난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송영길 의원은 지난 4일 "김 지사에 대한 유죄판결과 법정구속은 판사의 경솔함과 오만, 무책임과 권한남용"이라며 "박근혜 정권 때 오염된 양승태 체제의 사법 농단 세력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도 같은 날 논평에서 "민주당은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 청산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에 대한 탄핵과 함께 사법부의 개혁을 위한 법제도 개선방안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 부장판사가 참고인 신분으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과 관련한 조사를 받았던 점을 상기시키는 듯한 논평이다. 성 부장판사는 2016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재직당시 형사수석부장에게 영장 관련 기밀을 전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민주당의 이런 모습에 법조계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지나치다'는 말이 나온다. 특검 관계자는 "수사 때는 특검에 협박성 발언을 하더니 판결이 내려지자 사법부를 똑같이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30일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성창호 판사가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선고공판을 진행하는 모습. 성 판사는 이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연합뉴스]

30일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성창호 판사가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선고공판을 진행하는 모습. 성 판사는 이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연합뉴스]

2010년 당시 민주당 정책위의장으로 한나라당의 '사법 개혁'을 '사법부 길들이기'라 반대했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정치인들은 판결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정략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김 지사 판결에는 물론 아쉬운 점이 있다. 이 부분은 판사 개인의 공격이 아닌 항소심에서 주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장판사 출신의 여상원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는 "정치 지도자들의 판결 불복 발언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며 "정치인들이 앞장서 그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일반인들은 판결 결과를 아예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각에선 김 지사의 변호인단 구성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지사를 수행했던 것은 오영중 변호사지만 실제 재판은 판사 출신의 최종길 변호사(법무법인 케이씨엘)가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때부터 김 지사를 도운 변호인은 피고인(김지사) 입장에 경도돼 새로운 논리를 구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31일 오후 국회 본청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 1차 대책위 회의에서 김 지사의 변호인인 오영중 변호사가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오후 국회 본청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원회 1차 대책위 회의에서 김 지사의 변호인인 오영중 변호사가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김 지사 판결문을 살펴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항소심에선 기존 김 지사의 변호인단의 입장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과 논리가 필요하다"며 "1심 결과에 대해 변호인단 입장에선 할말이 없을 것"이라 했다.

성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쓰는게 문제였다면 변호인단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하거나 추가 증인 신청을 통해 성 부장판사의 인사이동 시기까지 선고를 미루는 방안을 검토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 부장판사는 김 지사 재판 선고 이틀 뒤인 지난 1일 법관 정기인사에서 서울동부지법으로 전보됐다.

김 지사를 조사했던 허익범 특검팀의 박상융 특검보는 "이번 판결은 특검의 수사 내용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다. 정치권의 공격과 논평에 대해 일일히 대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허익범 특검은 정치권의 비판에 대한 입장을 묻자 메시지를 보내 "수사와 관련해 한쪽 당사자인 제가 법정 밖에서 입장을 밝히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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