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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나무는 한국이 심고, 열매는 일본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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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호 29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그러니까 벌써 7년 전 일이다. 대규모 국제기구인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 GCF)사무국을 인천 송도에 유치했다며 환호한 것 말이다. GCF는 UN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상설기구로 출범시키는 마당이었다.

박근혜 정부 때 ‘녹색성장’ 지우기로 #국내 본부 둔 GCF서도 목소리 못 내 #일본은 GCF 총장 공모에 정부가 뛰며 #국제환경문제에 조용히 영향력 키워 #우리도 ‘녹색성장’ 브랜드 활용할 때

돈 있는 곳에 마음도 눈길도 가는 법. 국제기구야 많지만 돈을 만지는 국제기구는 위상도 관심도 남달라 당시 한국의 GCF사무국 유치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었다. ‘한국의 쿠데타’라고도 했고,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세계은행총재도 한국인임을 빗대 “한국이 세계를 지배한다”고까지 했다. 어쨌든 이 일은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녹색성장’ 브랜드 효과를 본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이후 한국은 GCF본부 유치국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리더십을 보였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한국의 무관심과 무능에 대한 불만의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금 GCF는 사무총장 공모 중이다. 이제까지 1, 2기 두 명의 사무총장이 모두 중도에 자진사퇴했다. 정확한 내부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드러난 팩트(fact)만 보아도 질곡의 세월이 엿보인다. 당초 기금 30억 달러를 내기로 했던 미국은 10억 달러만 내고 나머지는 못 내겠다며 ‘배째라’해버렸다. GCF에 기금을 신청했던 프로젝트 신청기관들은 ‘준다 안 준다’ 말도 없이 일관된 ‘무결정’으로 상시대기 중이라며 아우성이었다. 한국은 1기엔 이사로 활동했지만 2기(2016~2018년)에는 이사에서도 제외돼 국외자로 떠돌았다. 박근혜 정부 시절 내내 ‘녹색성장 지우기’탓에 기후변화 관련 진영은 아예 천덕꾸러기신세로 전락해 글로벌 리더십을 운운할 처지가 못 됐다.

한데 이런 우리의 빈틈에 일본이 슬그머니 밥숟가락을 들이민다. 이번 사무총장 공모에 가장 열렬히 뛰고 있는 게 일본이란다. 일본 정부는 단일 후보를 공모에 내보낸 뒤 GCF 측엔 ‘하는 거 봐서 큰 보탬을 줄 수도 있다’는 눈짓을 계속 보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발등의 불인, 미국이 펑크 낸 20억 달러를 메우는 문제도 최근 독일이 15억 유로를 더 내기로 하면서 한숨 돌렸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구멍이다. 이런 마당에 일본인 사무총장이 나온다면 일본이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기후변화기금의 활성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름에는 섭씨 40도, 이 겨울엔 초미세먼지.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인한 기후변화뿐 아니라 그 오염까지, 환경의 재앙을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일본이라도 나서준다면 고마운 일이라며 대승적 차원에서 박수를 보내는 것이 쿨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러기엔 뒷골이 아주 많이 당긴다. 일본이 ‘가랑비에 솜옷 젓듯’ 시나브로 세계 환경 진영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게 이젠 눈이 띌 정도여서다. 현재 지구적 환경문제 투자와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지구환경금융(Global Environment Facility, GEF)의 CEO도 일본인 나오코 이시이다. 이번 GCF 총장까지 일본인이 맡게 되면 환경 관련 양대 국제기금 수장은 모두 일본 차지다.

반면 한국은 ‘녹색성장’ 브랜드의 깃발만 요란하게 들었다가 이젠 국제 환경진영에서 존재가치마저 흐리멍덩해지고 있다. 사람(이명박 전 대통령) 밉다고, 오랜만에 내놓은 세계에 통할 브랜드마저 묻어버린 꼴이다. 브랜드 아까운 것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엔 기후변화에 대한 세계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파리협정에서도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과거 부시 전 대통령이 도쿄의정서 탈퇴를 선언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미국 현지의 반응은 10여 년 전과 완전히 다르다. 부시 당시엔 환영했던 미국 산업계와 지방정부가 달라졌다. 2500개 이상의 지방정부, 기업, 대학 등이 파리협정 준수를 지지하는 위아스틸인(We are still in)을 결성해 트럼프 행정부와 맞서고 나섰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동조하는 한편으론 탄소저감 기술개발에서 낙후되면 미래 산업이 없다는 자각에서다. 또 지난해까지 197개국이 파리협정 세부규칙 이행에 합의했다.

이처럼 녹색성장 관련 어젠더와 시장은 마구 확장 중이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이미 선점한 브랜드를 정치적 은원으로 놓아버린 세월이 아깝지 않은가. 물론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덴마크에서 녹색성장의 계승·발전을 천명했고, 올해부터 한국이 GCF 이사진에도 포함되는 등 변화의 조짐은 보인다. ‘녹색성장’은 오랜만에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꽤 호소력 있는 정책브랜드다. 미워도 다시 한번, 대한민국이 지구적 리더십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모멘텀으로 이 브랜드를 적극 활용할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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