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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비건, 北 '비핵화 살라미'에 '인센티브 살라미' 맞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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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비건. [EPA=연합뉴스]

비건. [EPA=연합뉴스]

한·미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인센티브 살라미’로 협상에 나섰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가 북한에 제안한 에스크로(escrow) 계좌 개설을 통한 경제 보상 패키지는 한·미가 물밑 협의를 통해 마련한 방안으로 파악됐다. 이 구상은 한·일·유럽연합(EU) 등 관련국들이 미국과 협의해 현금 수십억 달러를 제3국 계좌에 예치해 두고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이행할 때마다 상응조치와 보상으로 계정에서 돈을 인출해 지급하는 것이다. 이 안을 처음 보도한 워싱턴타임스는 익명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황금 항아리(pot of gold, 큰 보상)’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크로 계좌에 현금 예치하고 #북한 비핵화 조치 때마다 보상 #“북·미 내달 4일 판문점 실무협상” #미 언론, 정상회담 세부 조율 보도

이는 북한이 그간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며 비핵화를 잘게 쪼개 보상을 극대화하는 ‘비핵화 살라미’ 전술을 구사한 데 대해 미국 역시 북한에 비핵화한 만큼 보상한다는 ‘보상 살라미’로 나선 셈이다.

‘에스크로’는 계약 당사자 간 신뢰도가 높지 않을 경우 제3자가 중개인으로 개입하는 일종의 보증제도다.

미국에선 부동산·자동차 등 거액이 오가는 계약에서 활용되는데 이를 비건 특별대표가 비핵화 협상에 도입했다. 비핵화 조치 없인 제재 완화는 없다는 미국과 상응 조치 보장 없이 비핵화를 먼저 할 수 없다는 북·미 양측 입장차를 ‘제3국 계좌’라는 중간 장치로 해소한다는 구상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 입장에선 비핵화를 할 때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이 눈앞에구체화된다는 이점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최우선 과제인 경제발전을 위한 종잣돈이 제3국 은행에 예치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선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확인한 후 보상을 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재만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낸다는 건 경제학 용어로 ‘불완전 계약’, 즉 계약이 성사될 수 없는 상태와도 같다”며 “비핵화도 구체적 조치를 이끌어 내려면 구체적 가격을 매겨야 성사될 수 있다. 이번 구상은 그 첫걸음”이라고 평가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경제발전을 목표로 하는 북한에도 좋은 인센티브 안”이라며 “경제건설을 위한 종잣돈 보따리를 보여준다면 북한으로서도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이 제3국 계좌 방안을 수용할 경우 해당 제3국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오스트리아 등이 거론된다.

계좌 개설이 합의될 경우 한·미와 북한 간에 ‘비핵화 가격’을 놓고 치열한 흥정이 진행될 전망이다. 김병연 교수는 “핵무기 한 기당,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한 기당 금액을 산정해 약속한 뒤 에스크로 계좌에 해당 금액을 예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거액을 한번에 예치하면 현재 유엔 안보리 제재에도 위반된다. 협상을 진행하면서 IAEA 등을 통해 인증을 받고, 그때마다 인센티브 금액을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하는 방식이 가능하다”고 봤다.

제3국 계좌 방안의 관건은 북한이 수용할지 여부다. 워싱턴타임스는 28일 관련 내용을 보도하면서 비건 특별대표가 비공개 실무회담에서 이 안을 북한에 설명하고 설득을 시도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제3국 계좌에 누가 돈을 넣을지도 국가 간에 수싸움이 벌어질 대목이다. 미국은 한국의 기여를 강력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북한이 비핵화를 할 경우) 한국과 일본이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30일(현지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비건 특별대표가 판문점에서 2월 4일 북한 측 카운터파트와 만나 2월 말로 예정된 2차 북·미 정상회담 세부사항을 조율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국무부에 따르면 비건 특별대표는 31일(현지시간)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 스탠퍼드대를 찾는다. 이곳의 월터 쇼렌스타인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스탠퍼드대엔 지난해 북·미 정상회담 주역이었던 앤드루 김 전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이 적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비건 특별대표가 강연 후 앤드루 김으로부터 ‘대북 협상 팁’을 전해 들은 뒤 북한의 김혁철 전 스페인주재 대사 등과 협상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일 트위터를 통해 “북·미 관계는 역대 최고다. (중략) 곧 김정은을 만나길 고대한다. 큰 차이를 만들어낸 진전!”이라며 2차 정상회담 준비가 궤도에 올랐음을 알렸다.

전수진·이유정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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