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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은 빨치산, 한 쪽은 경찰 - 양민학살 두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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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남 나주시 봉황면 덕룡산 자락에 자리잡은 두 농촌 마을에서 두 건의 양민 학살이 벌어졌다. 낮이면 경찰, 밤이면 빨치산 세상이던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장성마을에선 빨치산에 의한 학살이, 인접한 철야마을에선 경찰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 평화롭던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생존자들은 당시의 한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두 마을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건 매한가지인데 좌익.우익 구분이 어디 있겠냐"고 입을 모은다. 55년만에 학살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함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송기인)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22일 온 '조사개시 결정'을 알리는 편지에는 장성마을 사건은 빠져있었다.

사진=김태성 기자

◇빨치산에게 20여명 총살 당한 장성마을= "밤 9시쯤 갑자기 '밤사람'들이 닥쳐서 '나오라'고 하길래 다들 나갔지. 마을사람 20여명을 골목안에 몰아넣더니 앞을 막아서고 총질을 한겨. '다다다다'하고 콩 볶듯이 총소리가 요란혔어."

장성마을의 임한대(70)씨는 51년 11월19일 밤에 벌어진 참극을 어젯밤의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하고 있던 사랑방에 빨치산 수십명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빨치산은 낮엔 산속에 숨어있다 밤만 되면 마을에 나타나 소.돼지를 다 끌고가는 통에 '밤사람'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다짜고짜 모여있던 주민들을 골목에 몰아넣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는 사람도 마을 입구까지 쫓아가서 총을 쏴 죽였다.

마을주민 모임은 얼마전 빨치산이 우익 가족 6명을 죽인 것을 두고 '말조심하자'고 당부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넘의 집살이 하던 조모씨가 '비평을 한다'고 밤사람들한테 찔렀나봐. 그땐 뭘 하나 잘못했다고 누가 찌르면 바로 총살시켜버리는 무법천지였응께"라고 임씨는 말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임씨는 도망쳐서 살아남았지만 같이 있었던 형님은 그 이후 행방불명이 됐다. 형의 시체도 찾지 못한 것이 그에겐 두고두고 한이다.

당시 그렇게 아버지나 아들,형님을 잃은 집이 장성마을 100여 가구 중 20집이 넘었다. 부친을 잃은 임한조(68)씨는 "우리 아버지는 농사 짓고 산 사람인데 뭔 잘못을 했겠냐"고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이 사건 뒤 임한조씨의 어머니도 홧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빨치산의 보복이 두려워 누구 하나 경찰에 신고조차 못했다.국군이 이 지역을 수복한 뒤 빨치산은 모두 흩어졌고 억울한 촌부들의 죽음은 세상에서 잊혀져버렸다.수십년간 아무런 조사도 없었다.그러다 최근 미군.국군에 의한 학살이 이슈화되자 이 마을 사람들도 "좌익에 의한 학살도 같은 양민학살"이라는 생각에 유족회를 꾸리고 과거사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마을 이장 조창길(63)씨는 "정부에 보상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진실을 규명을 해서 위령제라도 열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철야마을에선 경찰이 집단 학살= 51년 2월26일 아침 장성마을과 인접한 철야마을에 무장한 경찰이 몰려왔다. 경찰은 "공비가 들어왔으니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마을 입구로 나오라"했다. 마을 사람들 중 일부를 골라 뒷산에 있는 '동박굴재'라는 골짜기로 끌고 올라갔다.

이 마을 서상국(69)씨의 부모님도 그렇게 끌려 올라갔다. "내가 펑펑 울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쫓아가는데 경찰이 '너는 가라'고 해서 더 못 갔어.그런데 좀 있으니까 총소리가 들리더라고."

서씨의 부모님과 함께 끌려간 주민 30여명 중 변소 속에 숨거나 시체 밑에 깔려 있어서 살아남은 사람은 서너명뿐. 다른 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 중엔 "우리 시아버지는 아무 죄 없다"고 말리던 임신 8개월 임산부도 있었다고 한다.

같은 마을 서병현(74)씨도 이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형이 50년 7월에 보도연맹이라고 경찰에 끌려가서 생매장 당한데 이어 또다시 닥친 비극이었다. 서씨는 "뒷산을 경계로 반란군과 경찰이 밀고 당기고 할 때여서 경찰이 악이 나서 그런 거 같다"며 "아무 이유도 없이 총살 당하고 가정이 완전히 파탄 났다"고 말했다.

경찰이 두려워 시신 수습도 바로 하지 못했다. 사흘 뒤 밤에야 가서 가마니로 덮어 시신을 집마당으로 옮겨올 수 있었다. 어디에 억울한 죽음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경찰에 의한 양민학살은 쉬쉬해야하는 일이었다. 나주 봉황유족회 회장 양성일(68)씨는 "지난 시절엔 양민학살을 얘기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며 "'이제 와서 사실을 밝혀봤자 뭐하냐'며 고개를 흔드는 유족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명예회복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22일 철야마을에 반가운 편지가 배달됐다.진실화해위에서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고 알리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웃 장성마을 은 아직 조사 결정이 나지 않았다. 양성일 회장은 "봉황면 전체를 같이 조사하는 줄 알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진실화해위는 "가해 주체가 각각 빨치산과 경찰로 달라서 별도의 팀에서 맡았다"며 "사건의 대표성과 중요도에 따라 조사개시 여부를 결정하다보니 장성마을 사건을 좀 늦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한애란,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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