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실사→후인수」원칙 지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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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부실의 바다를 표류하던 「조공」호가 새선주를 찾았다.
총6천8백76만달러의 돌이킬수 없는 손실을 가져온 6척의 다목적 운반선 인도지연으로 지난 87년4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 2년1개월만의 일이다.
한진이라는 새 선주를 찾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만큼 조공의 공전으로 쌓인 손실도 커졌지만 이번 조공부실정리의 「뒷맛」은 여러모로 개운한 데가 많다.
우선 산업정책적인 면에서 이번 조공부실정리는 「선실사 후인수」라는 6공식 부실정리의 기록을 남겼다는데 의의가 있다.
인수자부터 먼저 정해놓고 실사를 진행, 뒤에 구체적인 인수조건을 타결지음으로써 여지껏 「비리」의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5공시절의 부실정리 방식을 깨끗이 청산한 것이다.
그결과 인수기업이나 정부는 비리의 의혹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아 좋고, 은행은 8백62억원이라는 뜻밖의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 만족해 하고있는 모습이다.
물론 그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5공때처럼 수십개의 부실기업들이 무더기로 줄을 서서 정리를 기다리는 상황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어쨌든 이번 일로 역시 부실기업정리의 원칙은 실사후 공개경매라는 평범한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공개경매가 가능했던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비록 모선인 조공자체만으로는 순자산을 2천1백30억원이나 까먹었을 만큼 부실의 늪이 깊지만 극동해운·부산수리조선·광명목재·동해조선등 조공이 거느리고 있는 나머지 선단들이 꽤 괜찮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부둣가의 터좋은 광명목재 땅 4만평을 비롯, 조공 5개 계열사들이 부산 곳곳에 갖고 있는 부동산만도 약 17만평이 되고, 부산수리조선·동해조선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일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탄탄한 회사이며, 또 조공만 하더라도 총 외형의 약 40%만이 조선부문일뿐 나머지 60%는 기계·건설·항공측량등 영업이 다각화되어 있어 업종 전환이나 확장등의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조공은 지난 2년간 선박 수주를 한척도 못했으므로 다른 조선소들과는 달리 도크 사용 스케줄이 모두 비어있어, 국제적으로 선가가 치솟으며(올 5월 현재 선가는 86년 10월 대비 95%상승) 조선·해운경기가 활황세를 타고 있는 지금, 좋은 값에 일감을 따올 수가 있다.
앞으로의 조공 정상화의 관건이 바로 그같은 해운·조선경기의 상승세를 얼마나 오래갈 탈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한진은 그래서 신탁은행측의 내정가 2백69억원을 5백97억원이나 초과하는 8백62억원의 거금을 선뜻 던진 것인데 이로써 한진은 해운뿐 아니라 조선을 함께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종합 해운사로 구색을 갖췄고, 이는 국내 조선업계의 판도는 물론 앞으로 재계전체의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수 있을만한 「영토확장」이다.
게다가 정부는 현재 조선산업을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할 것을 구체적으로 검토중이어서 한진의 조공정상화 노력은 세제상의 지원이 따라붙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번 조공의 부실정리과정이 모두 괜찮은 그림만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1, 2차 공매에서부터 계속 경합해오던 한진과 진로 모두 자기자본 비율이 애초의 입찰자격기준인 15.2%에 미달, 결국 할수 없이 입찰기준을 끌어내려 새 주인을 찾아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부실정리와 대기업의 확장 억제라는 정책목표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맞아떨어지기 힘든 것인가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씁쓸히 곱씹게 하는 대목이다.
그나마 은행이나 정부가 다행스럽다고 자위하는 것은 조선·해운과의 연관이 전혀 없는 진로를 누르고, 약 2백척의 선단을 보유하고 있어 자체 물량만으로도 조공계열사를 돌릴수 있는 한진이 조공을 인수해 갔다는 사실 정도이다.
한진측은 오는 20일 가계약을 체결하면 정식으로 인수 실사팀을 투입, 곧 구체적인 정상화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장 해결해야할 문제도 산적해 있다.
현재도 28%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벌어지고 있는 조공의 노사분규도 그같은 당면문제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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