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칼럼

광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광장은 흩어지고 갈라진 길이 모여 접점이 형성되는 곳이다. 광장에는 공유와 공감의 전류가 흐른다. 서울의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네거리, 부산의 벡스코 광장, 광주의 금남로가 다시 축제의 장소로 복원되는 것은 흥겨운 일이다. 4년 전 운동권 출신의 정치세력이 참여정부의 출범을 알릴 때 광장은 참신한 행렬을 맞이할 준비로 들떠 있었다. 대한민국의 21세기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어우러지는 광장에서 축제의 노래로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광장은 논리의 각축장이 되었고 이념투쟁으로 얼룩졌다. 이런 전환을 축구가 해냈다면, 축구는 어떤 정치 지도자들보다 위대하고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심오하다. 전환의 계기는 축구이지만, 그 에너지는 축제를 향한 국민의 갈증이다.

분노와 적대감이 개혁정치의 필요조건은 아닐 터이다. 근거 없는 화합도 분명 미덥지는 않다. 좌절.위기.긴장 속에 살아온 우리에겐 어떤 형태로든 의례(儀禮)가 필요하다. 누구를 제물 삼아 원망을 태워버리는 제사도 아니고, 업보를 사해 달라고 비는 산신제도 아니다. 지난 세기 한반도에 내렸던 풍상(風霜)을 어루만지는 축제, 나의 소망과 너의 결핍을 채워줄 흥겨운 축제라면 좋다. 시민 모두 자리 박차고 일어나 생면부지의 옆 사람을 스스럼없이 껴안는 그런 축제 말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비난과 탄식, 공세와 규탄이 마치 냉온전선이 부딪쳐 생성되는 적란운(積亂雲)처럼 무섭게 번지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프랑스와의 일전이 있었던 그제 새벽, 100만여 명이 광장응원에 나섰고 온 국민이 TV 앞에서 밤을 새웠다. 한 골을 향한 국민의 염원은 라이프치히 첸트랄 경기장에 집중됐다. 그 맹렬한 열기 덕분인가, 공은 몸을 뒤치며 어렵게 골문으로 밀려 들어갔다. 붉은 함성이 새벽을 깨웠다. 새벽을 깨우고 싶은 욕망, 날 세운 논리도, 상대를 공격할 전략도 필요 없이 넋 놓고 대한민국을 합창할 그 흥겨운 시간을 갖고 싶은 욕망이 그렇게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역사 해석에서, 그리고 미래 기획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신선한 의욕의 물줄기를 이렇게 느꼈던 때가 언제였던가. 대한민국을 외치는 절창에는 비단 붉은 패션으로 맵시를 낸 젊은 세대의 소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50대, 이순(耳順)의 나이를 훌쩍 넘긴 노년들이 불화로 얼룩진 시대를 그만 접어 달라는 애원이 진하게 배어 있다.

한국전이 열리는 경기장마다 함성을 토해내는 한국인들의 응원전을 연일 세계에 타전하는 외신들은 이런 점을 보지 못한다. 극성맞은 한국 사람들, 혹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국가성장주의의 표현 정도로 해석할지 모른다. 정보기술(IT) 강국과 한류를 일궈낸 역동성을 읽어낼지도 모르겠다. 하긴, 축구에 이런 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민소득 500달러의 나라가 3만 달러의 나라를 침몰시키는 광경은 불가항력적 세계화를 단숨에 전복시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치열한 국가 간 경쟁시대에 승전의 대리만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극성맞은 함성은 균열과 배타적 담론들로 찢긴 광장의 '어두운 역사'를 중단하라는 독촉장이다. 취향.스타일.이념이 서로 다른 개별 주체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광장이라면, 그것을 복원하고 싶은 욕망을 이심전심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8년 동안, 특히 지난 3년 동안 왜 그렇게 고단하고 위축된 삶을 살아왔던가. 뭔가 정의로운 것을 해야 한다는 당위명제와 개혁구호에 주눅 들어 격의 없이 불러제치는 축제의 노래를 왜 지금껏 유보해 왔던가를 새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환호와 갈증이 넘실거리는 광장에서 자문하고 싶다. 월드컵이 막을 내린 뒤, 이 갈증은 또 어떤 계기를 찾아나설 것인가? 도대체 정치는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을 허락할 것인가? 축제는 우리에게 어떤 형식으로 올 것인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