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21. 환자 진료 25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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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바쁜 개업의 시절에 바깥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진료에 몰두하고 환자에게 헌신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나는 후학들에게 '환자에게 미친 나의 세월'을 얘기하곤 한다.

산부인과를 운영하던 시절, 난 1년 365일 외출은 꿈도 못 꿨다. 계절의 변화는 사람들의 얼굴에 핀 화사한 웃음이나 옷차림에서, 또 창 밖 가로수 잎이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느꼈을 뿐이다.

지금이야 눈 내리는 풍경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지만 그때는 환자의 옷차림에서 겨울이 왔음을 느끼곤 했다. 문만 열면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는 구름처럼 밀려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어느 날 진료를 하는데 찬바람이 느껴졌다. 연탄난로를 피운 대기실과 진찰실은 제법 따뜻한데도 냉기가 감도는 것이었다.

"왜 이리 추운 거지?"

내 말에 간호사가 진찰실을 나갔다 들어왔다. 그런데도 찬바람은 여전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진찰실에서부터 병원 밖까지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 바깥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이 닫히면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가 진료를 보지 못할까봐 굳세게 문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열악했던 당시엔 정말 그랬다.

더구나 건물 맨 위층에 살림집이 있어 난 그야말로 건물에 갇힌 채 오르내리며 살았다. 언제 겨울이 오고 가는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환자를 보느라 끼니조차 제때 해결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면 병원 일을 도와주던 언니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분유에 계란을 타서 내게 건네줬다. 링거 줄로 빨대를 만들어 마시기 좋게 해줬지만 그래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여유도 없었다. 촌각을 다투며 나를 기다리는 환자를 보러 가는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은 답답했다. 1층 진료실과 2층 수술실을 두세 계단씩 뛰어다녔다. 수술 환자는 마취하기 전에 손과 얼굴을 만져주고, 안아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수술을 마치면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진료 환자에게 달려갔다.

언니는 나를 따라다니며 "제발 한 모금만 먹어봐"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는 위급환자와 내 손길을 기다리는 대기 환자에게 몰두하다 보면 배고픔을 잊기 십상이었다.

잦은 수술과 밀려드는 환자 때문에 끼니를 거르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

정말로 밤낮없이 진료했다. 365일 24시간 진료가 맞는 표현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때 나의 절실한 소원은 한 시간만이라도 푹 자는 것이었다.

지금도 내 장롱 속에 곱게 걸어 놓은 잠옷을 쳐다보며 젊은 시절 회상에 젖곤한다. 미국 유학 시절 예쁜 잠옷을 하나 샀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난 환자에 빠져 있었다. 의사로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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