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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인인사이트] '프로는 아름답다' 카피라이터 최인아 "생각은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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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플랫폼 폴인(fol:in)의 스토리북 <브랜드 위클리>의 네번째 이야기 ‘지금의 최인아를 만든 결정적 순간 네 가지’의 일부를 공개합니다. 소셜 살롱 비마이비(Be My B)가 폴인 웹사이트에서 연재하고 있는 <브랜드 위클리>는 살롱에서 오간 매력적인 브랜드의 뒷이야기를 담습니다.

양파 껍질 까듯이, 죽을 때까지 나를 알아가는 게 인생이다

안녕하세요, 최인아입니다. 저는 29년 정도를 광고쟁이로 살았어요.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죠. 몇 년 전에 은퇴 같은 퇴직을 하고 3년 정도 자유인으로 놀다 보니 다시 또 일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2년 전쯤 선릉 근처에 작은 책방을 열어서 지금은 책방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최인아를 만든 결정적 순간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우리가 사는 방식’은 어려운 주제예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제 얘기를 안 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먼저 던져보려 합니다.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면, 저를 지금의 이 모습으로 만들어준 결정적인 순간이 몇 번 있었어요. 만약 그 순간에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 길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이 모습으로 있을 것 같지 않은 순간 말이죠. 결정적 순간이라고 하면 저는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사진작가가 떠오르는데요, 이 작가가 찍은 사진은 마치 동영상 같아요. 사진 한 장만 봐도 앞뒤의 스토리가 보이거든요.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후의 제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보이는 순간들이요.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결정적 순간을 붙잡는 법

진짜 결정적 순간이라면 스스로가 먼저 ‘아! 지금이 바로 결정적 순간이구나’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걸 붙잡을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저는 금방 알아차렸어요. 제가 가진 안테나는 바깥으로만 향해 있지 않고, 안으로도 향했있었거든요. 광고 일을 할 때나, 책방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나 제가 항상 첫번째로 던지는 질문은 ‘이걸 세상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니라 ‘나는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지’‘나는 뭘 하고 싶지’예요.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고요.

제일기획 부사장 출신의 최인아 대표는 2년 전 서울 선릉역 근처에서 독립서점 최인아책방을 열었다. [사진 최인아책방]

제일기획 부사장 출신의 최인아 대표는 2년 전 서울 선릉역 근처에서 독립서점 최인아책방을 열었다. [사진 최인아책방]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라는 책을 아시나요. 하루키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전에 꽤 오랫동안 도쿄에서 재즈 바를 운영했어요. 실제로 그의 책에도 음악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그런데 어느 날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대요. ‘떠나라’, ‘떠나라’. 그 북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하루키는 정말 떠납니다. 잘되던 재즈 바를 접고 무작정 유럽에서 3년을 머물렀어요. 그 여행 중에 쓴 소설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만약 하루키가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떠나라’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하루키는 없었을지도 몰라요. 가장 진실된 순간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트렌드가 어떻게 가느냐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리는 게 더 중요해요.

우리 몸은 늘 우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잘 모르죠. 여러분은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뭐하세요. 스마트폰부터 확인하고 씻으러 화장실로 향하겠죠. 마음은 벌써 출근해 있고요. ‘부장님이 오늘 나한테 뭐라고 하실지’, ‘오늘 회의할 거 있는데’등등. 나는 아직 우리 집에 있는데 생각은 벌써 회사에 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뭐가 울려 퍼지는지 잘 몰라요. 귀 기울이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자기에게 굉장히 중요한 순간일 수 있는데 그냥 흘려보내 버리는 거죠.

다행히 저는 어릴 때부터 제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고 저를 들여다보며 살았습니다. 제 인생의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글짓기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제게 “글 잘 썼다”며 나와서 읽어보라고 하셨죠. 반 친구들 앞에서 글을 읽고 제자리로 돌아오던 그 순간이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나요.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는 무언가를 쓰거나, 말을 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거 같다’고 느꼈거든요. 10살짜리 어린아이한테 그런 직감이 있다니 놀랍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저의 장래희망이 몇 차례 바뀌긴 했지만요. 그건 세상이 정해놓은 업을 기준으로 봤을 때 바뀐 것일 뿐, 늘 제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일을 해왔어요. 저한텐 광고도 그렇습니다.

살아남으려 선택한 반항이 만든 결정적 순간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은 제일기획에 입사한 84년도였습니다. 사회에 나갔더니 남자와 여자가 같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여자를 ‘열등한 존재’라고 대놓고 얘기했어요. 사규가 대표적입니다. 똑같이 4년제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3년 늦게 진급이 된다고 적혀 있었어요. 실제로 제 선배 중에 여자 대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 늘 따라다니는 설명이 ‘삼성 그룹의 첫 여자 부사장’이라는 수식어인데, 사실 전 제일기획의 첫 번째 여자 대리였고 여자 차장이었어요. 제 앞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남자가 4년 만에 대리가 될 때 저 같은 여자는 7년이 걸렸습니다. 당연히 연봉도 차이가 많이 났겠죠.

여기서 중요한 건 제 반응이에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거냐’ 아니면 ‘반항할 거냐’를 결정해야 했거든요. 이때가 저에겐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이었는데요, 전 반항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막상 반항을 해보니까 이 조직에서 ‘여자’는 소수민족하고 같더라고요. 남자들이 주류인 세상에, 소수민족인 내가 자리를 잡으려면 남자들을 다 적으로 돌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하나, 한 번에 뒤집는 건 쉽지 않아 보였어요. 제가 남녀 간의 3년 차이를 2년으로 줄이고, 내 후배가 1년으로 줄이고, 그 다음엔 격차가 아예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죠.

서울 선릉 최인아책방에 위치한 &#39;혼자의 서재&#39; 모습. [사진 최인아책방]

서울 선릉 최인아책방에 위치한 &#39;혼자의 서재&#39; 모습. [사진 최인아책방]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일을 잘하자’였습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려면 ‘프로페셔널(프로)’이 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러분은 지금 ‘프로’라고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연봉 많이 받는 사람일까요, 유능한 사람일까요. 그때 저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나이가 적든 많든, 얼굴이 예쁘든 안 예쁘든, 여자든 남자든 ‘그 일을 하려면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프로라고 생각했고, 프로가 돼야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제가 만들었던 광고 중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카피가 있습니다. 아주 절절한 제 얘기였죠. 여자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던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며 겪었던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마침 딱 맞는 프로젝트를 맡았고 대박이 난 거예요. 대박이 났다는 건 저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의미겠죠.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제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당장 나에겐 없다. 그러나 그 굳건한 환경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그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그걸 정할 수 있는 자유는 나한테 있다’라는 구절이에요. 당시 제 상황에 빗대어 말하자면, 여자를 열등하게 취급하는 세상에서 투쟁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건 제 자유라는 거죠. 그 사실이 제 숨통을 틔워줬어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내쳐졌을 때 그 환경에서 어떻게 할 거냐, 이건 선택권이 저에게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을 기억하면 약해지려할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될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회사원으로 살았던 29년의 세월 중에 앞의 절반은 여자여서 불리했고, 뒤의 절반은 오히려 여자라는 게 유리했습니다. 마케팅을 할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차별화잖아요. 제가 한창 실무자로 일할 때 저같이 회사를 대표하는 여자 선수가 업계에 거의 없었어요. 자동적으로 차별화가 된 거죠. 광고계도 경쟁이 치열해서 큰 프로젝트에는 대여섯 개의 회사들이 프리젠테이션(PT)에 참여합니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하루 종일 그 회사들의 PT를 다 봐야 하고, 사이즈가 큰 프로젝트는 한 회사에서도 여러 명이 나와서 발표하니 나중엔 제대로 기억 안 나요. 그런데 전 여자니까 제 이름은 몰라도 여자였다는 것만으로도 차별화가 됐어요. 그래서 앞의 절반은 불리했고 손해를 봤지만, 뒤의 절반은 오히려 기회가 아니었나 싶어요.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정말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에 도전해서 지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닫고 배운 어떤 것이 나한테 힘을 준다는 의미에요.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혹시라도 굉장히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혹은 앞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이걸 어떻게 헤쳐나가지' 생각하는 사람에게 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책을 꼭 추천해요.

온몸으로 생각하며 알게 된 것

제가 마흔 서넛쯤, 제일기획에서 상무 몇년 차쯤 됐을 때였죠. 더 이상 여자라고 저를 낮춰 보지 않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여자라는 고비를 웬만큼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봉우리가 있더라고요. 광고 업계는 다른 어떤 업계보다 사이클이 짧다 보니 ‘무능해 ‘라는 말보다 ‘올드해’라는 딱지가 훨씬 더 치명적이에요. 그런데 ‘내가 늙는구나’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늙는다고 생각하니 시간을 돌아보게 됐는데,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더라고요. 돈으로 비유하면 돈은 언제든 생길 수 있지만 시간은 생길 수 없어요. 계속 줄어들기만 하죠.

어느 날 출근해보니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눈이 풀려 있는 것 같았어요. 내가 여기서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두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1년 휴직하라고 하더군요. 1년 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신나게 놀다가 프랑스의 전직 언론인 올리비에 베르나르가 쓴 <나는 걷는다>라는 책을 보게 됐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가 은퇴 후, 실크로드의 서쪽 끝인 터키 이스탄불부터 중국 시안까지 걸으며 4년에 걸쳐 쓴 책인데요, 그가 실크로드를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갔던 곳이 바로 산티아고입니다.

책에서 산티아고를 보는 순간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여러 개의 코스가 있는데 그중 가장 기본적인 루트의 거리가 800킬로미터예요. 보통의 직장인이 휴가 내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면 가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휴직한 2006년에 가게 된 거죠. 36일 동안 800킬로미터를 다 걸었습니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서 배낭 메고 무작정 걸었어요. 걷게 되면 무엇을 가장 많이 하게 될까요. 바로 생각이에요. 생각한다고 하면 우리는 보통 책상 앞에서 하는 정신 운동을 떠올리실 텐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온몸으로 하는 거예요.

하루 내내 걷기만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처음엔 생각 A가 들어오는데 조금 있다 생각 B가 들어와 ‘그게 아니잖아’라고 해요. 다시 C가 들어오고 D가 오고요. 제 자신과의 시간을 많이 보낸 저조차도, 한 달이 넘는 시간 내내 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지우고, 또 생각한 건 처음이었어요. 20여 일쯤 지났을 때 제 안에서 솟구친 생각은 ‘돌아가야겠다’는 거였어요. 머물던 자리를 떠나서 보니 내가 아직 일에 대한 애정이 많다는 사실, 후배들과 회사에 대한 애정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제가 누린 것들은 내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저를 도와준 분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걸 깨달았는데 열심히 한 사람들이 다 보상받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게는 운도 많이 따랐다는 걸 스스로 터득한 거죠. ‘회사에 돌아가서 관절염 약이든, 치약이든, 후라이팬이든 하라는 광고를 다 해야겠다. 그동안 배웠던 거 다 돌려주고, 됐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일하자’고 결심했어요. (웃음)

 ※지금까지 읽은 최인아 대표의 이야기는 전체 분량의 40%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지식 플랫폼 폴인(fol:in)이 브랜드 소셜 살롱 비마이비(Be my B)와 함께 만드는 디지털 스토리북 <브랜드 위클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 위클리> 연재 목차

0. 린브랜드를 찾아서
1. 죠스푸드(1) 나는 어떻게 ‘경험 디렉터’가 되었나
2. 죠스푸드(2) 스토리 ‘텔링’이 아니라 ‘두잉’이다
3. 핑크퐁(1) 유튜브 120억 뷰, 핑크퐁 콘텐츠의 성공 전략
4. 핑크퐁(2) 핑크퐁은 어떻게 겨울왕국을 이겼나
5. 사실주의 베이컨(1) 아아, 당신이 알던 그 베이컨은 갔습니다
6. 사실주의 베이컨(2) 캬바레 사장을 꿈꾸는 베이컨집 주인의 남다른 취향
7. 최인아(1) 지금의 최인아를 만든 결정적 순간 네 가지
8. 최인아(2) 29년차 카피라이터가 만든 책방은 무엇이 다른가

※앞으로 8개의 매력적인 브랜드가 더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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