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혁명의 이상주의 못 살리고 사상의 공백 초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16호 30면

중국은 어떻게 물질만능주의에 빠졌나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
허 자오톈 지음
임우경 옮김, 창비

소장 중국 학자 자성의 목소리 #80년대 지식층 사상 토론 외면 #문화대혁명을 반근대로 매도 #인민의 위대한 에너지 잊은 채 #허무주의, 껍데기 개혁에 빠져

중국에 대한 두려움과 비호감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설마 했던 1인 권력체제의 가시화, 강화되는 검열과 통제, 거대한 부와 인구를 앞세워 약소국에 강짜를 부리는 경제보복까지. 세계는 부강해진 중국이 인류에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불안하다. 시장 개방으로 경제가 발전하면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애초의 나이브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다. 개방과 발전을 도왔더니 패권주의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탄식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드러내는 총체적인 문제들이 오로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아서일까. 그것이 진정 시진핑 시대 중국 위기의 본질일까.

서구적 규범을 준거 삼아 중국을 설명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중국학에서 반성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중국을 비판하는 우리의 사고는 점점 더 이원론적 틀에 고착되고 있다. 중국 비판의 획일화는 중국이 처한 문제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맥락을 간과하게 함은 물론, 중국 문제에 고뇌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할 위험을 지닌다. 우리는 종종 중국 정부에 대한 과격한 비판과 폭로로 해외 언론의 시선을 끄는 인사들을 보지만, 그 생명력은 대체로 짧지 않은가.

『현대 중국의 사상적 곤경』의 저자 허 자오톈(賀照田)은 자극적인 내부 고발자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글 대부분이 중국의 주류 학술 매체에 실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의 입지를 반증하지만, 그는 획일화된 중국 비판의 언술 구조에서 ‘반체제적’으로 분류되는 인사들과 거리가 멀다. 요란하지 않지만, 현대 중국이 처한 위기의 심층을 파고드는 이 책은 어떤 다른 비판보다 울림이 깊은 자성과 절규를 담고 있다. 자신감에 가득 찬 요즘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좀처럼 듣기 힘든 울림이다.

문화대혁명(1966~76) 당시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해 낡은 사상과 습관을 척결하자고 외치는 학생들. [AFP]

문화대혁명(1966~76) 당시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해 낡은 사상과 습관을 척결하자고 외치는 학생들. [AFP]

중국의 위기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저자의 관점은 우리에게는 생소하거나 어쩌면 관심 밖의 내용일지 모른다. 중국의 위기를 일당독재 같은 제도적 차원에서 찾는 세간의 비판과 달리, 그는 개혁·개방 직후 중국의 정신적·사상적 위기에 주목한다. 위기의 핵심은 1980년대 중국 지식계에서 벌어진 지적 토론들이 사실상 중국 정부의 개혁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수면 위로 떠오른 사상적 문제들을 무의식 속에 가둬버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80년대를 대표했던 신계몽주의 사조는 문화대혁명을 ‘반근대 운동’으로 규정하고 시장주의에 기반한 경제발전을 통해 근대세계와 ‘궤도 접속(接軌)’하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적극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건국 이후 근대를 표방했던 신중국이 어떻게 문화대혁명 10년간이나 반근대의 소용돌이에 빠졌는지, 그 에네르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묻지 않았을뿐더러,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가치체계가 붕괴한 후 갈 곳을 잃은 에네르기가 거대한 허무주의로, 배금주의로 전화되는 현상을 모른 척 지나갔던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마오의 사회주의 유산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다. 저자는 중국 혁명의 위대성을 계급을 초월하는 ‘인민’의 창출에서 찾는다. 국민당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공산당이 건국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혁명의 핵심 역량 외에도 혁명을 옆에서 돕거나, 돕지는 않더라도 혁명이 잘되기를 바라거나, 적어도 발 벗고 나서서 혁명을 반대하지는 않는 광범위한 인민의 대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민’이라는 말에는 모종의 공통된 역사 감각과 가치 감각, 정서 감각이 충일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이 인민의 일상적 삶의 감각으로 일체화되었던 이상주의적 국가였다.

말하자면, 현대 중국의 사상 위기는 장구한 중국 혁명 과정에서 이상과 열정으로 응결되었던 인민의 거대한 삶의 에네르기가 개혁개방이라는 새 시대에 걸맞은 또 다른 건강한 에네르기로 재탄생하는 데 실패했으며, 중국의 지식계가 그것을 방기했다는 데 있다. 이제 그는 묻는다. 흩어져 버린 이상주의의 자원을 어떻게 되살릴 것이냐고. 그리고 강조한다. 부강한 중국이 세계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은 다시 한번 위대해져야 한다고. 위대한 중국은 과거의 숭고했던 이상주의를 회복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백지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중문학 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