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의소곤소곤연예가] "전성기 놓칠쏘냐" 조형기의 깁스 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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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MBC 사투리 버라이어티쇼 '말달리자' 분장실에서 팔목에 두툼한 깁스를 하고 나타난 가수 이정을 만났다. 며칠 전 녹화 중에 격파를 하다가 오른 손바닥의 뼈를 다쳤다고 한다. 한창 새 앨범을 내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던 터라 그런지 이정은 평소 밝은 성격임에도 얼굴 표정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이때 예능 프로그램의 지존이자 큰 형님이신 탤런트 조형기가 걱정하는 이정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며 하는 말.

"10년 전인가? 녹화 중에 나도 발목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지. 추격신으로 2층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인데 착지를 잘못해서 발을 삐끗한거야. 욱신욱신 쑤시고 아파도 살짝 삐었으려니 했는데 점점 퉁퉁 붓고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고. 하는 수 없이 나도 장화같은 깁스를 했지."

당시 코믹연기로 방송 3사 드라마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을 종횡무진 주름잡던 조씨로써는 상당히 타격이 큰 사건이었던 것. 의사는 절대 안정과 휴식을 권했고, 출연 중이던 프로그램 제작진들도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우울하고 힘들었지. 얼마만의 전성기였는데. 이러다 다시 조용히 묻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바로 며칠 후 전자제품 CF 촬영이 있었거든."

컨셉트상 깔끔한 양복을 입어야 하는데 촬영장에 깁스를 하고 나타난 조형기를 보고 화들짝 놀란 감독에게 무언가를 주섬주섬 내미는 조형기.

"바로 깁스 크기에 맞춘 구두였어. 전신을 찍을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했지. 바짓단에 가려 구두만 신고 서 있으면 감쪽같거든."

조형기의 치밀함에 감동받은 감독은 멋지게 또 재밌게 광고촬영을 마쳤고, 이로 인해 또다시 방송 섭외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는데.

"쇼 프로그램에서 MC 제안이 들어온 거야. 그런데 첫 녹화 때까지는 도저히 깁스를 풀 수도 없는 상황이고 서있거나 걸으려면 목발까지 짚어야 했거든. 오프닝에서 성우가 '새로운 MC 조형기를 소개합니다'라고 하면 내가 문 뒤에서 짠하고 나타나 중앙까지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들어가면 부담스럽잖아. 그래서 목발을 기타처럼 연주하며 한발로 총총 뛰어갔지."

이날 조형기의 재치에 관객들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줬고, 이를 본 시청자들도 그의 깁스 투혼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정은 녹화 도중 깁스를 한 자신의 오른 팔을 마이크처럼 들고 멋지게 노래 한 가락을 뽑아 마치 10년 전의 조형기처럼 뜨거운 박수와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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