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15. 이길여 산부인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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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축한 ‘이길여 산부인과’ 옥상에서 간호사와 포즈를 취한 필자(左).

4년여의 결코 짧지 않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와 가족.친지들을 부둥켜안으며 상봉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가장 먼저 후배에게 맡겼던 병원을 찾았다. 내가 배운 선진 의술을 펼칠 곳이었다. 난 그 터에 지하 1층, 지상 9층 규모의 병원을 신축했다. 한시라도 빨리 진료하고 싶은 마음에 공사를 독려해 첫 삽을 뜬 지 10개월 만에 36개 병상을 갖춘 병원이 완공됐다. 개인병원으론 인천에서 가장 컸다. 간판을 자성의원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로 바꿔 달았다. 내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69년 가을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체험했던 선진 시스템을 가능하면 이 병원에 도입하려 했다. 산모들을 위해 호텔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렵던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지역 주민들이 신기한 듯 엘리베이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기도 했다.

1층은 진료실과 대기실, 2층은 수술실로 썼다. 병원 문을 열자 예전의 환자들이 떡을 해오는가 하면, 일부러 병원에 들러 귀국을 축하해 주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병원 운영의 모토를 '봉사'로 정했다. 그리고 모든 시설과 장비도 환자의 편의와 눈높이에 맞췄다. 지금이야 환자중심 경영을 외치는 병원이 많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개념이 없었다.

나는 산부인과 진찰대가 한국여성의 체형에 잘 맞는지,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진찰받을 수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직접 진찰대에도 누워봤다. 직원들 앞에서 어찌나 민망한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 환자는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끼겠나 싶었다. 그래서 진료시 환자가 그런 느낌을 갖지 않도록 직원들을 철저히 교육했다. 나는 이후 요일별로 직원들에게 친절은 물론이고 영어회화.부인과.산과.여성질환 등의 교육을 정례화했다.

첨단 의료기 도입에도 앞장섰다. 당시 생소했던 초음파 의료기기와 자궁 경부경을 사들였다. 태아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초음파 기기는 실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태아의 심박동 소리를 들려주면 "저것이 우리 아기가 내는 소리냐"며 남편.시어머니 등 보호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궁 경부경은 환자 교육에 요긴하게 쓰였다. 경부경은 환자에게 자궁의 병변을 모니터로 보여주는 것으로 질병의 심각성을 알려 열심히 치료받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 시절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참을 때까지 참아보는 식이었다. 더 이상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이 돼서야 병원을 찾으니 안타까운 사연도 많았다.

산부인과 간판이 걸려 있는데도 다른 질환자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들 역시 내가 진료할 수 있으면 성심껏 보살폈다. 진찰 한번 받으려고 몇 시간씩 기다리는 환자, 몸이 꽁꽁 언 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환자, 고통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환자…. 그들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환자들이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병원 문은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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