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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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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고두현(1963~ )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보세요.

낮은 파도에도 멀미하는 노을

해안선이 돌아앉아 머리 풀고

흰 목덜미 말리는 동안

미풍에 말려 올라가는 다홍 치맛단 좀 보세요.

남해 물건리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삼십 리 물미해안, 허리에 낭창낭창

감기는 바람을 밀어내며

길은 잘 익은 햇살 따라 부드럽게 휘어지고

섬들은 수평선 끝을 잡아

그대 처음 만난 날처럼 팽팽하게 당기는데

지난 여름 푸른 상처

온몸으로 막아주던 방풍림이 얼굴 붉히며

바알갛게 옷을 벗는 풍경

은점 지나 노구 지나 단감빛으로 물드는 노을

남도에서 가장 빨리 가을이 닿는

삼십 리 해안 길, 그대에게 먼저 보여주려고

저토록 몸이 달아 뒤채는 파도

그렇게 돌아앉아 있지만 말로

속 타는 저 바다 단풍 드는 거 좀 보아요.



시는 어떤 장소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김용택 시인이 없었다면 섬진강의 이미지는 지금과 많이 달랐겠지요. 시인들은 저마다 풍경의 부동산을 몇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고두현 시인은 물미 삼십리 해안 길을 시의 등기부등본에 올렸네요. 이제 물미에 가면, 고 시인이 떠오르겠지요. 섬진강에 가면, 우리가 '용택이형'을 떠올리듯 말이에요.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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