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 국민들도 보고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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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벌써 오래 전부터 대학가 주변에서는 우방의 국기를 오손하는 행위가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불타는 모습은 이제 뉴스가 아닐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학교 건물 현관 앞에 성조기를 펼쳐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밟지 않을 수 없게하는 모습이 몇몇 대학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 대학에서는 성조기와 함께 일본국기까지 아예 페인트로 그려놓고 모든 출입자들이 문자 그대로 이를 「유린」하도록 해놓고 있다.
학생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과 일본에 분풀이하는 효과적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본래의 의도로 보나 우리 사회의 통념으로 보나 유치한 일이다.
반미나 반일감정은 과거 우리나라와 그들과의 불평등했던 관계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런 감정의 표현은 앞으로 이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카타르시스적 기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 국기를 그런식으로 모독하는 방법은 현명하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는 양식에도 어긋난다. 국기란 한 나라가 갖고 있는 지상의 상징물이다. 그 속에는 그 나라 국민의 과거·현재·미래를 통틀어 국민·영토·주권뿐 아니라 그들의 이상과 가치관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우리의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그 속에는 식민지시대의 굴욕과 이에 대한 항쟁의 피눈물이 아로새겨져 있고 미래를 향한 꿈과 희망이 담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태극기를 그 누구도 오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외국의 국기에 대한 오손을 그 나라에 대한 반감의 표현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 반미·반일감정이란 그 나라의 특정시대, 특정정책에 대한 우리의 불만표시이지 그들 나라 전 역사와 미래를 무차별하게 혐오하는 것일 수는 없다.
우방의 국기를 오손하는 행위가 부당한 두번째 이유는 아무리 미국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사무친다해도 그런 감정이 국민대 국민의 반감을 촉발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면서도 서로 민간인밀집지역에 대한 공격은 삼가는 것은 전쟁을 주도하는 정부가 적이지 전쟁이 끝나고 다시 국교를 정상화시킬 때 화해의 상대역은 상대방 국민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서로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극기에 대해 애착을 갖는 만큼 미국과 일본 국민들도 그들의 국기에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국기를 오손하는 것은 곧 미·일 국민들의 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그런 결과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할 전방위 선린관계의 앞날을 그르치게 할 위험이 있다. 또 그런 결과는 우리 스스로가 미일에 대해 경계하는 국수주의·자국우선주의에 우리가 얽매이게 하는 잘못을 범하게 만들 것이다.
학생들은 이제 과거만 보지 말고 미래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된다. 우리의 외부에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은 과거집착과 국수주의적 좁은 안목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과제다.
남의 나라 국민들이 아끼는 국기를 짓밟는 행동은 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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