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화학이야기

타미플루와 신약 개발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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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감기에는 약이 없다'고 말한다. 열이 나면 해열제, 기침이 나면 기침약을 사용하여 증상을 완화시킬 뿐 원인인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감기 바이러스 치료제가 등장하게 되어 '감기에도 약이 있다'고 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독감(인플루엔자)은 전염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감기에 비해 증상이 훨씬 심하다. 주로 겨울철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 호흡기계에 기관지염.폐렴.중이염 등의 합병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최근 아시아.유럽 등 유라시아 대륙을 조류인플루엔자(AI)가 휩쓸고 있다. 전 세계로 확산될 경우 5000만 명이 사망한 1918년 스페인 독감과 같은 인명피해가 날 수 있다고 세계보건기구(WHO)가 경고하였다. 공포가 확산되면서 유일한 치료제로 공인된 타미플루는 없어서 못 팔 정도의 히트 상품이 되었다.

바이러스는 사람의 호흡기로 들어가면 점막세포에 침투한 뒤 증식한다. 타미플루는 바이러스가 다른 세포를 공격하기 위해 이용하는 뉴라미데이즈 효소에 결합하여 확산을 차단, 고사시키는 혁신적인 치료제다. 1999년 스위스 로슈에서 상품화하였고 2016년까지 독점 판매권을 갖고 있다. 현재 주문이 폭주해 공급 부족 사태를 빚고 있는 가운데 미국.영국.프랑스 등은 사재기에 나섰다. 일본은 모든 인구를 커버하는 물량을 비축하겠다고 밝혔다. AI의 최전선에 놓인 가난한 아시아 개도국들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의 1.5%인 70만 명분만을 확보하고 있다. 문제는 로슈가 공장을 완전 가동해도 10년이 걸려야 WHO가 권고한 인구 20% 복용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료계에서는 로슈가 독점권을 풀고 다른 회사들이 생산할 수 있도록 강제 실시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9.11 테러 이후 탄저균 소동이 일어나자 미국은 독일 바이엘사의 탄저병 치료제 가격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특허권에 대해 강제 실시를 한 바 있다.

AI에 대항할 '무기'로 타미플루가 유명하지만 이를 한국인 화학자가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길리야드(Gilead)의 김정은 부사장은 타미플루를 비롯한 7종의 항(抗)바이러스 치료제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타미플루는 로슈에 기술 이전됐고 길리야드는 설립 10년 만에 20억 달러의 매출액을 기록하는 등 50대 글로벌 제약사로 성장했다. 최근 내한한 김 부사장은 "신약 개발은 규모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한국도 충분히 발전 가능하다"고 말했다. 세계 유수의 제약기업 머크의 연구개발(R&D) 역시 한국인 2세 피터 김(한국명 김성배)과 데니스 최(한국명 최원규) 두 사람이 총지휘하고 있다. 한국인의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다. 할리우드뿐 아니라 신약 개발에도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사용한다. 연간 10억 달러 이상 팔리는 '대박' 의약품을 의미한다. 한 개의 블록버스터 신약이 소형 자동차 300만 대 수출과 맞먹는 수익 창출 효과가 있다. 글로벌 신약 개발은 서방 선진 7개국(G7)의 고유 영역이었다. 87년 물질특허가 도입된 뒤 15년간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는 2003년 고유의 약(팩티브)을 글로벌 시장에 진출시킨 열 번째 국가가 되었다. 높은 진입 장벽을 넘기 위한 입장료는 이미 지불하였다. 불모지에서 시작하여 그동안 14개의 국산 신약을 개발하면서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하였다. 이제는 당당하게 600조원의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여 한국산 '대박'이 터지기를 염원한다.

김성수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약력=서울대 화학교육과, 한국과학기술원 유기화학 박사, 한국화학연구원 생명화학연구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