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미국에서 울리는 '5월 광주'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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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의 정신을 담은 그림들이 미국 나들이를 간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진주한 광주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시민들을 저버린 미국이 20여 년이 흘러서야 그 시절 아픔을 회화로 만난다. 역사는 흐르고 두 나라 관계는 굽이굽이 시련을 겪었지만 잊을 수 없는 광주민주항쟁의 목소리가 화가의 몸을 통해 바다를 건넌다.

한맺힌 광주 시민들의 넋을 그린 이는 화가 홍성담(48)씨다. 80년 5월 광주를 증언하고자 영정 판화를 파고, 고문을 견뎌냈던 그는 이제 뉴욕으로 건너가 시대의 고통을 치유하는 굿판같은 전시회를 펼친다.

10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열리는 '동쪽의 물결'전은 '저항과 명상'이란 곁제목을 달았다. 광주민주항쟁을 기록한 '5월 판화' 45점과 그 현장을 증언하는 설치미술과 회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회복'을 주제로 한 홍씨의 근작 등 84점이 1,2층 전시장을 메운다. 그가 '한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슬픔의 덩어리'란 불렀던 '5월 판화'가 한국현대사의 중요 대목을 미술로 풀어낸 일종의 기록화라면, '물속에서 스무날' 연작은 폭력과 서구가 지배한 20세기를 물로 다독이는 부적같은 그림이다.

'물속에서 스무날'은 옛 안기부 고문실에서 겪은 화가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의자에 몸이 묶인 한 남자가 물 속으로 잠수하며 물고기들과 만난다. 욕조 속에 머리가 박히는 순간, 화가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 환상들이다. 그는 물고기들과 어우러져 놀고 고기 뱃 속에 들어가 잠이 든다. 밥이 보이고 연꽃이 핀다. 물주전자 속에서 쏟아지는 물은 강을 이루고 물고기가 된 사내는 꼬리를 물고 도는 원형 속에 들어가 한 폭 만다라가 된다. 화가는 자신의 육신을 혼절하게 했던 물을 길어올려 시대를 뚫고 나갈 부적을 그렸다. 물 속에서 모든 목숨붙이들의 숨통이 열린다.

전시를 기획한 장경화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죽은 이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자에게 명상의 참 원리를 깨우쳐 주었고 그 시신을 묻은 땅, 진흙 속에서 홍성담은 그들의 꽃을 피워내는 직분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홍씨의 몸을 빌려 그림에 스며든 동쪽의 물이 이제 쇠와 칼을 들고 피흘리는 서쪽, 미국 땅을 적시러 흐르기 시작했다. 062-525-0968.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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