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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면 '통신 재앙'인데…소화기는 1대 뿐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5일 오전 전날 화재가 발생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KT아현국사에서 KT 관계자 등이 복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25일 오전 전날 화재가 발생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KT아현국사에서 KT 관계자 등이 복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북서부 일대를 통신대란에 빠뜨린 KT아현지사 통신지하구 화재 당시 소방시설로 소화기 1대만이 비치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소방설비 의무규정이 도마 위에 올랐다. 스마트폰·카드결제·인터넷 등 통신이 시민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해지고 있는 반면, ‘통신 재난’에 대한 제도적 발전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대뿐인 소화기, 이마저 없어도 무방  

25일 소방당국에 따르면 지난 24일 오전 11시12분쯤 발생한 KT아현지사 지하통신구 화재 당시 현장에는 소화기 1기만 비치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16만8000유선회로와 광케이블 220조 뭉치가 설치된 통신구에 화재 예방을 위한 설비가 소화기 1대뿐이었던 것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행법상 이 소화기 1대조차 있을 필요가 없다”며 “소화기 1대도 형식적으로 갖춰놓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화재 한방에 무너진 '스마트라이프' #소화기 1대조차 없어도 현행법상 '무방' #500m이상 공동지하구만 소방설비 의무 #"압축 공기포 등 자동식설비도 필요" #"KT 자체 안전설비 마련했어야" 아쉬움도

현행 소방법에 따르면 지하구의 길이가 500m 이상이고 수도ㆍ전기ㆍ가스 등이 집중된 ‘공동지하구’에는 스프링클러ㆍ화재경보기ㆍ소화기 등 연소방지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반면 KT 통신지하구는 수도ㆍ전기ㆍ가스 시설 없이 통신회로와 케이블만이 설치된 단일지하구였다. 길이도 30m에 불과해 연소방지시설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다.

소방시설 부재로 커진 통신지하구 화재는 서대문구·마포구·은평구·중구 등 서울 북서부 일대의 통신마비로 이어졌고, 이는 그대로 시민들의 '생활 마비'로 이어졌다. 지난 1994년에도 서울 종로5가 한국통신 통신지하구에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지만 당시에는 유선전화기와 호출기, PC 통신 정도가 피해를 입었다. 화재 한 번으로 모든 통신과 결재가 마비됐던 이번 KT화재 피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진입 어려워 자동식소화설비도 필수

이에 따라 지하구 연소방지설비 의무 대상에서 500m 이상이라는 길이제한을 없애고, 단일지하구에도 기본적 소방설비를 설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송영호 대전과학기술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만일 KT화재 장소에 자동화재탐지설비를 센서 수신감지가 좋은 불꽃감지기 등으로 설치했다면 화재를 초기에 진압해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요즘처럼 통신이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고 통신시설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통신 마비는 하나의 재난의 범주에 속하게 됐다”며 “과거에 만든 법에 따라 통신시설의 안전 관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통신지하구에 자체 진화시스템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보통 통신지하구의 크기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라 화재가 발생해도 소방관의 진입이 어렵다. 실제 KT아현지사 화재 당시에도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다 신고 접수 10여 시간 만에야 완전히 불을 잡았다. 공 교수는 이에 대해 "통신지하구에 소방관의 진입이 불가능한 점을 감안해 압축공기포 소화설비 등 자동식 소화설비 구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KT, 스스로 안전 확보했어야“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설사 소방시설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더라도 통신설비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을 KT가 자체적으로 안전을 확보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공 교수는 "소방법은 최소한의 규정을 마련한 것일 뿐이다"며 "KT측에서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소방설비를 갖췄다면 극심한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송 교수도 "안전과 재난의 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며 "소방의 범위 넘어서 안전의 관점에서 KT가 보다 적극적으로 재난에 대비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과 소방, KT, 한국전력 등 4개 기관은 25일 오전 10시30분부터 합동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우선 육안으로 화재 현장을 살펴본 뒤 향후 정확한 원인 파악을 위한 합동 감식에 들어간다. 경찰 수사도 합동감식 진행 과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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