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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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히로히토」 전 일왕의 장례식에서 일본이 벌인 부산함, 그리고 그에 대해 일본인들이 큰 정치적·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일본은 아직도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서 그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지난 1백 20년 동안 동양과 서양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여파가 러시아와 중국혁명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노쇠한 청제국을 전격적으로 패배시키고 이어 1910년 한국을 합병함으로써 중국이 각성, 결과적으로 청을 멸망시켰고 중국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와 함께 1905년 일본은 대마도 해협에서 막강한 러시아함대를 격파하고 여순에서 일본육군이 승전, 결과적으로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양식민주의를 물리쳤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냈으며, 1941년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개전 후 처음 얼마동안 미국을 태평양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서양세력을 아시아에서 몰아내겠다고 나섰으나 그 대신 자신이 아시아인들로부터 적대와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일본은 이른바 명치유신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서양세력과 어깨를 겨루기까지 이르는데 성공했으며, 스스로 일본을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운명」을 가진 나라라고 자부심을 갖게됐다. 이같은 생각은 일본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졌다.
이같은 자신들의 특별한 운명에 대한 자각은 19세기초 그동안 형해화 돼있던 신도의식을 명치유신으로 다시 부활시켰으며, 그러한 전통은 그후 계속 이어져 이번 「히로히토」의 장례식까지 강하게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19세기에 영국에서 배운 서구의 정치적 모델은 자유로운 것이었으나, 제국주의도 함께 배웠다. 일본의 만주침공은 쇠망한 인도 무굴제국에 대한 간섭과 비슷한 것이었다.
새로운 강국 일본은 유럽 제국의 그것과 같은 국제적 지위를 요구했다. 중국에서 서양열강들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치외법권을 추구했다.
그러나 서양열강들은 일본에 그러한 특권을 주려하지 않았다. 영국·미국 등의 연합국들은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병력을 지원, 승리로 이끈 후 1919년의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서 인종적 평등을 선언하자는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다.
1933년 국제연맹은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주사변을 규탄했고 그후 세워진 만주국의 승인을 거부했다.
이같은 서양의 일본에 대한 적대시는 30년대 일본의 소위 「암살에 의한 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몰고 갔으며 반 서양·반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휩쓸었다.
일본의 정치인 중 자유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은 살해되거나 정계에서 축출됐으며, 그 대신 파시즘과 군국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의 서양에 대한 복수심의 결과는 참혹한 패전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죽지 않았다. 패전 일본은 다시 한번 서양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미국이 그 대상이었다.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의 성공은 다시 한번 서양으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서유럽은 아직도 일본을 독립된 대국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미국은 일본을 고마워 할 줄 모르는 피 보호국가이자 불공평한 경쟁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불행한 역사를 경험했던 아시아국가들은 일본의 세력강화를 두려움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현재 정계의 금융스캔들을 비롯한 자민당일당의 장기집권에서 오는 폐단, 그리고 신왕의 즉위 등으로 인한 국내적 혼란에 휩싸여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심각한 의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일본이 세계에서 차지해야 할 위치·역할과 일본이 서구화에 치른 대가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문화적·도덕적으로 고립된 나라이며 유아독존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일본은 분명 화려하고 강력한 국가이지만 정치적 신뢰가 부족하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본에 합당한 위치는 어디며 또 그 책임은 어떤 것인가? 일본이 다른 나라에 지고 있는 채무는 무엇인가? 일본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그동안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는 너무나 해석이 엇갈리고 서로 피해의식이 있었다.
이 문제가 잘못 다뤄질 경우 결과는 나쁘게 끝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월리엄·파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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