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년 노 대통령에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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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족 자존의 새 시대」와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온 세계에 엄숙히 선언하며 36%의 국민적 지지를 청와대행으로 연결시킨지 만1년이 되어갑니다. 이 3백65일이란 하루하루는 사람에 따라 『이제 겨우』 그렇게 밖에 안되느냐고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벌써 세월이 그렇게 빨리』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편에서 살아가든 분명한 사실은 위대한 역사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그 심판은 준엄하다는 것입니다.
노 대통령귀하.
돌이켜 보면 귀하는 근대우리 역사가 낳은 행운의 집권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6·29선언이 있었든, 없었든 귀하는 이미 대통령직에 오르도록 운명지어 졌습니다. 이제 5공화국의 계승자로서의 신분증 경신을 위한 6·29조치는 귀하로 하여금 국민적지지를 얻으려는 많은 공약을 해야만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더우기 대통령선거 기간 중 귀하 특유의 억양으로 『믿어달라』며 내걸였던 1백여가지의 대국민 약속과 1988년2월25일 대통령취임사에서의 선언까지를 훑어보면 지난 1년이란 세월이 귀하나 국민에게 얼마나 해야할 일이 많았던 소중한 민족사적 한 순간순간들 이었는가를 절감케 될 것입니다.
『물량성장과 안보를 앞세워 자율과 인권을 소홀히 여길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힘으로 억압하거나 밀실의 고문이 통하는 시대는 끝났읍니다』며 『저를 포함한 지도층이 스스로 정직과 진실의 수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고 취임사에서 말했읍니다.
귀하를 행운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취임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교적 부작용이 적었던 점과 귀하만큼 당장 해야할 일들이 많으면서도 명백할뿐만 아니라 하면 할수록 인기도를 높일 수 있는 소재가 많은 대통령이 없었다는 사실, 그리고 전임자와의 상대적 평가에서 엄청난 기본점수를 따고 들어갔다는 점 등등 때문입니다.
선거직후 강력히 제기되었던 부정문제가 올림픽호재로 가려졌는가 하면 5공 비리·각종 민중생존권문제·지방자치제·악법철폐 등은 북방정책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국민들을 환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손수 들었던 가방과 와이셔츠차림의 원탁회의가 준 충격으로 부풀었던 개방시대의 꿈과 기대에 회의가 깃들이기 시작한 것은 귀하가 취임하기도 전에 알려진 5공 계승의 내각개편부터였습니다. 역대 어느 정권과 마찬가지로 민족사가 요구하는 능력 있고 참신한 국민적 존경을 받는 내각구성에서 드러난 실패는 이미 오늘의 상황을 예견한 것이었읍니다.
귀하는 벌써 헌정질서와 체제수호를 위한 공권력 행사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체제수호의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과 재창조의 의무도 있다고 봅니다. 물려받은 체제와 이념과 통치철학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일만이 국가원수의 신성한 임무는 아닐 것입니다. 지난 잘못은 과감히 드려내어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참조하는 체제개혁의 성패여부에 따라 정치의 신임도는 결정되는 것이지 얼마나 어제의 유산을 손대지 않고 잘 보관하는 창고지기의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점점 4·13조치시대로 뒷걸음질하는 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만큼 체제논쟁과 공권력 강조가 현격히 늘어남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구시대의 모든 악법들이 유령처럼 새시대에 활개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법률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정치의 위대성이 결정된 적이 없습니다. 법률만이 체제를 수호해줄 능력을 지닐 수도 없고 법이 없어 체제가 허물어진 기록을 역사는 갖고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악법을 버려야할 순간에 섰는데 어째서 도리어 또 다른 악법이 만들어지려하고 있습니까. 북방정책과 남북화해시대의 국가보안법·사회안전법은 마치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시대착오일뿐입니다.
진정한 북방정책과 민족통일을 위한 정책수립을 원한다면 먼저국민의 지지를 다질 수 있는 과감한 개혁이 앞서야함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개방시대란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치관이지 특정인만을 위한 조치여서는 안됩니다. 누구는 금강산 구경도 하는 판에 누구는 이웃나라 여행도 자유롭지 않대서야 무슨 개방입니까.
노 대통령귀하, 귀하에게 약속 받지 않은 많은 국민적·민족적 여망까지 실현시켜줄 것을 기대할 만큼 오늘의 우리 국민들은 들뜨거나 허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귀하가 국민과 명백히 약속한 사실에 대해서만은 그 집행과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취임 1년을 맞는 자리에서 재확인했으면 하고 .기대를 가집니다. 자질구레한 사안들이 쌓여있읍니다만 가장중요하고 포괄적이며 시급한 것은 중간평가 문제입니다. 『서울올림픽 직후 국민들로부터 재신임 등의 방법으로 중간평가를 받겠다. 6·29선언과 각종 공약 및 정책의 약속이 잘못 실천됐다고 국민들이 평가한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 그 책임의 의미에는 사퇴도 포함된다』는 87년 12월12일의 여의도 유세를 실현하는 문제가 가장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충격요법의 장기를 가진 귀하께서 취임 전후는 물론이고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그 신선한 충격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도 될 구실을 만들기에 급급하다가 끝내는 나라와 국민 모두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어 자신까지도 불행하게 되었던 지난날의 과오가 다시는 이 당에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내 건강하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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