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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은 겪었다…전문직 여성들이 털어놓은 성폭력 실태

중앙일보

입력

[연합뉴스]

[연합뉴스]

A 변호사 “인턴 때 지도검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어린 여자 인턴들만 따로 불러내 회식하면서 자신의 성생활 이야기를 늘어놓고 ‘너희들과 해도 내가 체력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등의 성적 농담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하면 그때 적절히 항의하지 못한 것이 매우 후회스럽고 화가 납니다.”

B 의사 “인턴으로 근무하던 시절 총괄 레지던트인 선생님이 밥을 사주겠다고 나오라고 불렀다. 내가 당직인데도 자꾸 권해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게 됐고, 차 뒷문으로 갑자기 잡아끌어 만지기에 ‘이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C 기자 “가해자는 나보다 3~4년 먼저 입사한 선배 기자였고, 나는 회사에 잘 적응하고자 하는 마음에 선배가 술자리로 부르는 족족 나갔다. 그날 매우 빠른 속도로 폭탄주를 주는 대로 마시다가 내 주량을 초과했다.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데도 가해자는 내 셔츠 사이로 손을 넣어서 가슴을 만졌다.”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 여성의 절반이 직장 내에서 성희롱 등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5일 한국여성변호사회에 따르면 의료인이나 변호사, 언론인 등 전문직 여성 1015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들 중 509명(50.1%)이 직접적인 성희롱이나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복수 응답을 통한 성폭력 유형으로는 외모, 옷차림, 몸매 등을 성적으로 희롱, 비하, 평가하는 행위를 경험했다고 답변한 응답자가 541명으로 가장 많았다. 또 성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행위(540명), 고의로 신체를 건드리거나 몸을 밀착시키는 등의 행위를 시도한 경우(497명), 이성 옆에 앉기 강요, 러브샷 강요 등 원치 않는 행동을 강요하는 행위(482명)가 뒤를 이었다.

복수 응답을 통한 가해자 지위를 조사한 결과 임원이나 부서장, 선배 등 상급자가 72%를 차지했다. 주로 회식 장소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경험했고, 직장 내나 야유회 등 직장 행사장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성희롱‧성폭력을 경험하고 나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응답자가 대다수인 것으로 조사됐다. 모르는 척하거나 슬쩍 자리를 피했다는 응답자가 270명(29.0%)으로 가장 많았고, 농담으로 웃어넘기거나 분위기에 동조하는 척했다는 응답자가 206명(22.1%), 별다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응답자는 180명(19.3%)이었다. 직‧간접으로 당사자에게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응답자는 256명(27.4%)에 그쳤다.

그 이유로는 당황해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가 188명(27.1%)으로 가장 많았고, 분위기를 깰까 봐서가 133명(19.2%)으로 다음이었다. 한 변호사는 “고객으로부터 겪은 성희롱을 직장 내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며 “‘이래서 여자는 같이 일하기 불편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전문직 여성의 경우 교육 수준이나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이유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에서 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외부적 시선과 더불어 피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입게 되는 불이익이 훨씬 클 수 있다는 불안감 등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를 숨기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본 연구가 여성과 남성 모두 안전하고 건강하게 노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강한 근로 환경을 만들기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이 되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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