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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조폭' 보다 더 나쁜 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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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조직폭력을 줄여 말하는 '조폭'은 요즘의 우리 사회에서 여러 얼굴을 지녔다.

'조폭과의 전쟁'이라 할 때의 조폭이 원조(元祖) 조폭이다. 사회 정의를 해치는 암적 존재이며, 공권력과 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런 조폭이 이른바 '조폭 영화'에서는 다르게 그려진다. 실상 대부분의 조폭 영화는 폭력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폭력을 소재로 삼은 코미디다.

그래서 원조 조폭에다 여러 가지 상상력의 조미료를 칠 수 있었다. 학생.선생 조폭에다 마누라 조폭까지, 사람들이 원조 조폭의 참뜻을 잊을까봐 걱정이라는 엄숙주의가 발동될 만큼 다양한 조폭이 만들어졌다.

이념 갈등이 차용(借用)해온 조폭도 변종 조폭이다. 보수.진보의 대립 속에 나온 '조폭적'이라는 수식어가 그것이다. 언필칭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은 타도 대상으로 삼은 기득권 집단을 조폭에 빗댔다. 선.악으로 갈라지는 세상에서, 견고하고 뿌리 깊은 악의 집단과 타협은 없다는 뜻을 조폭이란 단어에 증오와 함께 실었다.

여기서 상상력이나 이념은 잠시 제쳐두고 원조 조폭을 생각해보자.

조폭은 과연 나쁘다. 왜. 법을 어기고 사회 정의에 반하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조폭만 법을 어기는 게 아니다. 교통법규를 어겨 범칙금을 무는 시민도 있고, 부도를 막다 막다 결국 부정수표단속법에 걸려 구속되는 기업인도 있다.

조폭이 악질인 것은 그들이 대부분 이권으로 먹고 살기 때문이다. 자기 구역에서 돈을 뜯거나 불법 영업을 하거나 공사입찰에 개입하는 것 등이 다 그렇다. 폭력으로 진입장벽을 치거나 무자격자를 진입시켜 보호해주는 행위다. 그러면서 경쟁을 제한하고 효율을 해친다.

여기에 상상력을 동원하면 힘없는 사람들이 착한(?) 조폭의 힘을 빌려 더 큰 폭력과 맞설 수도 있고, 거친 이념을 들이대면 기득세력 전체를 싸잡아 조폭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런데 상상력이나 이념 말고 현실을 보면 조폭보다 더 못된 집단이 있다.

이들은 갈등을 일으키고 집단행동에 나서는 데는 선수들이지만 설득과 협상을 통한 합의에는 익숙지 않은 막무가내파다. 대개 거창하고 정의로운 구호를 내건다.

그러나 정말로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시민.사회운동을 한다는 일부 세력의 행태가 그렇다. 정부 정책을 설득하려 나선 군수를 집단으로 두들겨 패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우발적이라고 넘어간다.

기득권층을 싸잡아 배척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가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새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과격 노조가 그렇다.

이들은 결국 사회 전반의 생산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자신들은 생산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생산물에 얹혀 산다. 결국 숙주까지 죽여버리는 가장 바보 같은 기생충과 같다.

이들을 뭐라 부를까. 건달? 조폭 영화에서 건달은 조폭보다 한 수 위인 부류이니 그렇게 불러주기 싫다. 그럼 양아치? 점잖지 못한 말이기도 하지만, 양아치보다 더 해악스러운 존재이니 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 저나 이들을 어떻게 가려내고 어떻게 처리할까.

"국가는 정당성을 부여받은 폭력 기구다"라는 막스 베버의 말이 떠오른다. 사회의 혼란.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국가의 공권력 집행은 정당하다는 말이다.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