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김 회담 유감스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간의 단독 회담이 이렇다할 결실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로서 새삼 실망하거나 놀랄 필요는 없겠으나 적어도 유감스럽다고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 양측간에는 특위 정국의 종결·중간평가 등 당면 현안에 대해 커다란 이견이 있어 왔고, 이번 회담은 이런 이견에 대한 사전 절충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별 진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간의 회담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이견을 재확인만 하고 끝난 것은 아무래도석연치 않다. 이미 존재하는 이견을 재확인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 는 일이며, 서로 잘 알고 있는 주장만 되풀이 하는 것은 회담을 하는 본뜻에도 맞지 않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라면, 더구나 한 정당을 대표하는 영수라면 이미 잘 알려진 자당 주장이나 전달하고 잘 알고 있는 상대방 주장을 듣는 것으로 회담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영수가 아니라 말단 당직자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노 -김 회담은 최소한 보도된 범위안에서 본다면 정치지도자 들간의 회담답지 않다. 두 사람은 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 서로의 주장을 되풀이만 하고 말았다.
회담이란 존재하는 이견을 조정 절충이 되지 않더라도 회담에 임하는 당사자는 나름대로의 이견 극복방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김 회담의 과정을 보면 전혀 이런 노력이 있은 것 같지 않다. 한쪽에서 특검제를 하자 하면 다른 쪽에서는 정 한다고 나오면 거부권을 발동하겠소 하는 식이다. 특검제와 거부권의 예상되는 충돌을 막아보자고 가진 회담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한쪽에서는 이번 회담의 목적을 이견 과시에 두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어차피 합의는 안 될 테니 선명성이나 과시해 보자는 발상이 없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이번 회담에서 이견의 폭이 좁혀지지 않은데 대해 실망하기보다는 이견 조정에 임하는 이런 양측의 자세에 유감을 표하는 것이다. 영수회담쯤 되는 정치회담이라면 이번에는 실패했더라도 이견 조정을 위한 공동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원칙적 의지는 보여야 하고, 그를 위해 절충 창구의 설정이나 재회동의 여운은 남기는 것이 체통에도 맞는다.
정치 지도자들이 요즘처럼 나라 안팎에 일이 많고 우리 내부의 태세 정비가 시급한 터에 이런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하는데 대해서는 실망할 수 밖에 없다. 대 북한·북방 문제나 국내의 사회·경제적 과제 들을 생각하면 정치가 이토록 오래 답보하고 경색돼 있을 수는 없는 일인데도 기껏 영수회담이라고 한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런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면서도 우리는 이번 노-김 회담이 전혀 무의미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장시간에 걸쳐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재삼 음미할 기회를 가진 것만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이견의 확인이 재절충을 가능케 할 대안모색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리고 가시적 성과에 상관없이 여야 지도자들간의 회동 자체가 잦을수록 좋은 것이다.
앞으로 있을 노 대통령과 김대중·김종필 총재간의 개별 회담은 좀더 우리나라 최고의 정치 지도자들간의 회담답게 도량과 경륜을 엿볼 수 있는 회담이 되기를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