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반성문 쓰는 어금니 아빠·5세 준희 친부…"누굴 위한 눈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딸의 친구인 여중생을 추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영학(36)이 지난 9월 6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딸의 친구인 여중생을 추행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이영학(36)이 지난 9월 6일 서울 서초구 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살인범이 법원에 내는 반성문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실제 형량을 낮추는 데 효과가 있을까.

이영학 1심 사형, 항소심서 무기징역 감형 #숨진 여중생 아버지, 청와대 게시판에 청원 #"사형 면하기 위한 가짜 반성문" 반발 #'딸 암매장' 친부, 항소심서 반성문 16번 내 #"자기 살기 위한 비겁한 꼼수"라는 지적 #법원 "범죄 종류·죄질이 더 중요한 양형 기준"

중학생 딸 친구를 납치 후 살해한 '어금니 아빠' 이영학(36)과 다섯 살배기 친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고모(37)씨는 1, 2심 법원에 반성문 수십 통을 보내 감형을 시도했다. 이를 두고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방어권은 보장해야 한다"는 옹호론도 있지만, "피해자가 죽어 말이 없다는 점을 악용해 자기만 살려는 비겁한 꼼수"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이영학은 지난달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줄었다. 이영학은 항소심에서 반성문을 10여 차례 제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피고인이 반성하고 있고, 사형을 선고하는 건 가혹한 측면이 있다"며 원심을 깨고 감형했다.

준희(사망 당시 5세)양 학대치사·사건의 피고인들이 지난 3월 14일 전주지법 2호 법정을 빠져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친부 고모(37)씨, 동거녀 이모(36)씨, 이씨 친모 김모(62)씨. [연합뉴스]

준희(사망 당시 5세)양 학대치사·사건의 피고인들이 지난 3월 14일 전주지법 2호 법정을 빠져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친부 고모(37)씨, 동거녀 이모(36)씨, 이씨 친모 김모(62)씨. [연합뉴스]

하지만 숨진 여중생 A양(사망 당시 14세)의 아버지 B씨는 지난 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 딸을 돌아올 수 없게 만든 X을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영학이 반성문을 10여 차례 써 반성하는 기미가 보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사형을 요구했다. "(이영학의 반성문은) 사형을 면하기 위한 가짜 반성문"이라는 주장이다. 이영학은 지난해 9월 A양에게 수면제를 먹여 성추행하고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강원도 영월의 야산에 유기한 혐의(강간 등 살인)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영학은 "사형은 너무 과하다"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검찰도 "형량이 낮다"며 상고장을 냈다. B씨의 청원 글은 30일 현재 5600여 명이 동의를 눌렀다.

친딸 준희(사망 당시 5세)양을 학대해 숨지게 한 혐의(아동학대치사)로 1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고씨는 항소심 이후 8월 16일부터 10월 24일까지 16차례 반성문을 제출했다. 나흘에 한 번꼴로 반성문을 쓴 셈이다. 반성문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딸을 숨지게 해 후회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에게 살해당한 여중생(사망 당시 14세)의 아버지가 지난 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이영학을 강하게 처벌해 주십시오' 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어금니 아빠' 이영학에게 살해당한 여중생(사망 당시 14세)의 아버지가 지난 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이영학을 강하게 처벌해 주십시오' 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고씨와 동거녀 이모(36)씨는 지난해 4월 전북 완주군 봉동읍 자택에서 선천성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던 준희양을 학대·방임해 숨지게 하고 시신을 군산의 한 야산에 암매장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심 법원은 고씨를 비롯해 동거녀 이씨에게 징역 10년, 시신 암매장을 도운 이씨 친모 김모(62)씨에게는 징역 4년을 선고했다.

통상 형사재판 피고인은 형량을 낮추기 위해 반성문을 활용한다. 재판부가 형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이 진심으로 뉘우쳤는지도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고씨는 1심에서도 42차례나 반성문을 냈다. 하지만 그는 1, 2심 내내 "(준희양의) 직접 사인인 갈비뼈 골절을 일으킨 폭행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살인범의 반성문을 두고 "형량을 줄이려는 '악어의 눈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인터넷에선 반성문을 전문으로 대필하는 업체까지 속속 생기고 있다.

준희양 친부 고모(37)씨가 지난 1월 4일 전북 군산시 내초동 한 야산에서 열린 경찰 현장검증에서 시신을 묻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준희양 친부 고모(37)씨가 지난 1월 4일 전북 군산시 내초동 한 야산에서 열린 경찰 현장검증에서 시신을 묻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 내부에서는 피고인의 반성문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다. 판사들은 "반성문이나 탄원서가 양형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고 크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반성문 유무에 따라 집행유예와 실형이 나뉘거나 형의 종류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영학 사건을 맡은 2심 재판부도 사건 자체의 경중을 따져 사형이 과하다고 봤을 뿐 반성문 때문에 감형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형사단독 재판장 경력이 있는 9년 차 현직 판사 C씨는 "형량을 정할 때 반성문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반성문을 내는 경우 징역 1년을 선고할 것을 10개월 정도로 줄여주는 정도가 최대치"라는 설명이다. 그는 "법원은 범죄의 종류와 죄질, 범죄 전력 등 여러 양형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형량을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