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NIE] 고구려인 모습 담긴 '생활 박물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구려인이 남긴 고분벽화
북한 호남리 사신총의 현무도. 고구려 후기에 축조된 사신총엔 사방을 수호 한다는 청룡·백호·주작·현무 등 사신을 그려 넣었다. [중앙포토]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무용총. 특히 여러 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등장하는 무용도는 가무를 즐긴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중앙포토]

고구려 고분벽화의 대표 격인 안악3호분 벽화 속의 부엌 모습. 안악3호분엔 우물·부엌·푸줏간·마구간 등 4세기 중엽 생활을 옮겨 놓았다. [중앙포토]

남북한 학자들이 지난달 19일부터 2일까지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여덟 곳의 보존 실태를 공동 조사했다. 이 조사를 통해 평양의 진파리4호분과 호남리 사신총이 남한에 처음 선보였다. 벽화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타임머신 역할을 한다.'생활사 박물관'으로 불리는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생활 문화를 들여다본다.

◆ 고분에 왜 벽화를 남겼을까=옛날 사람들은 죽음 너머 세상에 새로운 삶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시신을 잘 보관하는 무덤을 만들었다. 또 죽은 뒤 세상도 현재와 이어진다고 믿었는데, 이런 생각이 무덤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따라서 권력자나 부자는 크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여러 물건과 살아있는 시종들까지 함께 묻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다 이러한 풍습이 사라지고 무덤 안에 죽은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려 넣게 된 것이다. 이 장례 의식에 따른 예술의 하나가 바로 고분벽화다.

무덤 속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 고구려만의 특징은 아니다. 기원전 2600년 이집트 피라미드에서도 발견된다. 벽화에는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거나 가축을 기르는 등 일상생활이 담겨 있다. 이탈리아.그리스.중국 등에서도 고분벽화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무덤 안에 벽화 말고도 돌에 그림을 그린 화상석 등 여러 형태의 그림을 넣었다.

◆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고구려의 고분벽화는 3세기에 시작돼 7세기 중반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초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는 다시 일본 고분벽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고구려에 뛰어난 고분벽화가 많은 이유는 고구려인의 생각과 무덤의 형태가 다른 나라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무덤은 그 안에 돌로 된 큰 방이 있고 천장도 높다. 따라서 천장에 그림을 그릴 공간이 넉넉해 천상 세계에 대한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고구려의 벽화는 벽면에 회를 바르고 완전히 마른 뒤 채색하는 방식이 주류다. 이는 고구려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외국의 벽화는 보통 젖은 회벽에 그리거나 마른 벽면에 그린다.

이런 점들이 중국의 고분벽화와 구별된다. 그래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뛰어난 색감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을 갖추게 됐고, 2004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벽화로 보는 고구려의 생활=고구려 등 삼국시대의 기본 옷차림은 남녀 모두 저고리와 바지였다. 저고리는 중국에 있는 각저총과 무용총 벽화에서 드러나듯 아랫단이 엉덩이에 이를 정도로 길었고, 깃을 왼쪽으로 여민다. 여자 복식의 기본형에는 저고리와 바지 외에 치마가 더 있다. 치마는 보통 치맛단에 저고리처럼 선이 더해진 것을 입었다. 주름치마와 색동치마도 등장한다. 남포 수산리 고분벽화에서 전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먹는 문화는 디딜방아와 키질하는 모습, 우물가 장독대 모습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조와 콩을 포함해 밀.보리.수수.기장 등 곡물류를 디딜방아로 도정한 뒤 키질해 알곡을 취하고, 조그만 창고(부경)에 저장했다. 음식은 흙으로 만든 화덕에 솥과 시루를 걸어 익혀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물가 장독대의 모습에선 발효식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육류를 섭취하기 위해 사냥 이외에 소.돼지.닭.개 등 가축을 길렀다. 안악3호 무덤의 외양간 등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주거지는 땅을 파 만든 작은 크기의 움집이나 반움집의 형태였다. 지배층의 경우 목재로 지었는데, 귀족 저택의 전경은 안악1호분 벽화에서 잘 드러난다. 또 온돌을 고안해 사용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귀족 저택과 관청 등에만 설치했다. 초기엔 부분 온돌이어서 실내 일부만 덥혀 다양한 평상(태성리 1호분)과 좌상, 걸상(무용총)이 벽화에 등장한다.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 잦은 전쟁 속에서 긴장 완화는 물론 집단 가무를 통해 결속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안악 3호분에선 뿔나팔.피리.소 등 관악기와 북.종.징 등 타악기를 든 고취악대가 등장한다.

놀이 문화로는 말 타기, 칼 부리기, 손.발 놀리기 등의 교예 관람이 있었는데, 주로 귀족을 위한 것이었다. 장천1호분과 수산리 고분벽화 등에 이러한 교예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사냥은 놀이나 육류 섭취 외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행사였다. 왕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의 정기적 사냥은 국가적인 제사의식에 쓰일 제물을 마련하고, 군사 훈련도 겸했다.

이태종 NIE 전문기자, 조종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