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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과 첫 수교…외교사에 새 지평-한·헝가리 대사급수교가 뜻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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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가 1일부터 사회주의 국가인 헝가리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 외교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로써 우리는 정부수립 44년만에 비로소 이념과 체제를 초월한 국가와 수교하는 외교지평을 열게된 것이다.
헝가리와는 지난해 9월13일 대사급 전 단계로 「상주대표급」관계를 터 자국민보호, 통상· 경제·문화·스포츠 등에서의 관계증진, 영사업무를 해봤다.
따라서 이번의 대사관계수립은 국가간 외교관계에서 완벽한 모양을 갖추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양국이 1년5개월여의 교섭 끝에 수교에 이른데는 우선 양국 정상의 의중이 맞아떨어진 것이 큰 요인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지난해 7·7선언을 발표, 중·소등 동구권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통해 대북한관계를 개선해 보겠다는 북방정책을 최우선 외교과제로 천명했다.
역시 지난해 5월 헝가리의 실권자로 등장한 「그로스」서기장은 헝가리의 개혁·개방을 주창하면서 대외관계에서는 전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겠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동구권국가 중 처음으로 서울올림픽 참가를 결정하고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었던(79년 미국이 30억 달러 차관제공) 헝가리를 첫번째 수교 대상국으로 선정하게 됐던 것이다.
헝가리도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경제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의 성장모델, 이에 따른 자본과 기술의 도입이 절실했기 때문에 양국의 협상이 급속도로 진전된 것으로 분석된다.
이같은 교섭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미소간의 신 데탕트 흐름이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다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우리가 보여준 여러가지 역량이 하나의 촉진제로 작용했다.
아무튼 헝가리와의 수교로 우리는 그동안 서방·비동맹 국가 일변도의 외교에 「균형추」를 얻어 전방위외교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외교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국전차원에서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대응책은 일차적으로 국내 정치의 안정에서 찾아야 한다.
헝가리와의 수교문제는 지난해 9월13일 상주대표급 외교관계개설 후 유엔총회(9월28일)에 참석했던 당시 최광수 외무장관이 헝가리의 「바르코니」외상과 접촉을 갖고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는 문제를 협의함으로써 본격화됐다.
그 후 지난해 12월7일 신동원 외무차관이 헝가리를 공식방문, 「그로스」서기장을 비롯한 헝가리의 공산당정부 인사들을 만나 관계 격상문제를 사실상 마무리지었고 금년 1월말께 「포른·줄라」국무비서가 한국을 방문, 서명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 내막적으로는 다소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와의 접촉에 앞서 헝가리는 그들의 오랜 우방인 북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문안작성 때도 헝가리는 『빠른 시일내 정식 외교관계수립을 위한 교섭에 들어간다』는 구절에 상당히 주저했다는 것이다.
또 대표부설치합의 조인식 때 지금은 한국 주재대사지만 당시 북한 주재대사를 오랫동안 지냈던 「에트레·산도르」씨가 사진에 나타난 것이 문제가 되어 대표부설치 발표직후 공개된 사진이 조인식 광경이 아닌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과 「그로스」헝가리서기장이 서있는 것이었다는 후문이다.
헝가리는 그 후 계속되는 북한의 항의에 의연하게 대처, 『우리는 나름대로의 실익을 위해 한국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항의 방식이 국제관례에 어긋난다는 점까지 지적했다.
박철언 팀이 지난해 8월24일 두번째로 헝가리를 방문했을때 이틀전인 22일 김평일이 신임대사로 신임장을 제정, 어려운 국면을 맞기도 했는데 결국 일이 잘 성사돼 김은 상주대표부 발표이후 소환 당하고 현재는 불가리아대사로 갔으며 헝가리에는 아직 후임대사가 임명되고 있지 않다.
헝가리 측은 우리 언론보도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특히 『헝가리가 1억여 달러 차관제공을 요청해왔다』는 보도가 나가자 임시 각의를 여는가 하면 한탁채 대표를 불러 항의도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양측이 서로의 체제가 다른데서 오는 오해라고 간주하고 넘어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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