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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웅의 검사각설

풍등과 시민의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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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단장(검사)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단장(검사)

1986년 여름, 천안시 목천읍에 있는 독립기념관은 개관을 불과 11일 남기고 불에 탔다. 으리으리하게 빛나던 구릿빛 기와는 화롯가의 갱엿 녹듯 흘러내렸고, 전 국민의 성금은 검은 재로 날아가 버렸다. 그중에는 주암댐 수몰예정지에 살던 내 친구 제철의 피 같은 성금 500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점에서 컵라면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제철의 성원을 태워버려서인지 수사기관은 화재의 책임을 물어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 그중에는 조명탑의 스위치를 켰던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스위치를 켜지 않았다면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핵 가방의 스위치도 아니고 고작 조명탑 스위치 하나 켰다고 구속된 것이 억울할 만도 하나 그는 전 국민의 분노 속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검사각설 10/22

검사각설 10/22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한 근로자가 바닥에 떨어진 풍등을 주워 날렸다. 그리고 10여 분 뒤 휘발유 43억원 어치를 저장하고 있던 저유소 탱크가 폭발했다. 그 근로자는 저유소 부근에서 위험하게도 풍등을 날렸다는 죄로 잡혀갔다. 풍등이 그렇게 위력적인지 미처 몰랐다. 만약 그가 원전 옆에서 풍등을 날렸다면 아마 후쿠시마 사고 같은 대형 참사가 터졌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풍등이라면 왜 진즉 위험물로 분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이면 행주대첩을 이끌었다고 하는 행주치마도 대량살상무기에 해당한다.

물론 국민은 풍등을 날린 근로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법이 야만이 아니려면 결과가 아무리 중하고 대중들의 분노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사람이 했던 것 이상으로 처벌해서 안 되고, 그가 인식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가 참혹하면 언제나 희생양을 찾아서 분풀이하곤 했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우리 사회는 그러한 야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은 ‘고작’ 기름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혹은 그 근로자가 워낙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에 관대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 화재로 큰 인명사고가 발생했었다면, 그럼 그때도 지금 같은 이성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분노가 커진다고 책임과 원칙이 달라져서는 안 되나 대중의 그것은 때로 풍등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김웅 대검찰청 미래기획단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