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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 태권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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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왜색(倭色)과 표절. 내게 씌워진 굴레였다. 지금까지도 혹자는 나를 '마징가제트의 아류'라 부른다. '깍두기인 줄 알고 먹었는데 알고 보니 다꾸앙'이란 비아냥도 들었다. 나는 그런 말들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마징가제트를 닮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태권도를 구사하는 '최초의 격투기 로봇'이다. 일본 최초의 격투기 로봇 '투장 다이모스'는 나보다 2년 늦게 태어났다. 이웃나라가 처음 만들어 낸 문화.문물을 들여오는 게 몽땅 '베끼기'로 매도돼야 한다면, 내가 욕을 먹어도 싸다.

내 나이 올해 꼭 서른. 공자님께서야 서른이면 뜻을 세우고(而立),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안다'(知天命)고 하셨지만, 한낱 로봇의 몸으론 그 고매한 뜻을 다 헤아릴 길이 없다. 대신 내 지난 30년을 잠시 돌아보고자 한다.

나는 1976년 7월 24일생이다. 생후 몇 년간 나는 인기 절정이었다. 요즘 잘나가는 한류 스타 저리 가라였다. 아이들은 극장에서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 V'를 따라 불렀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서울에서만 18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 그해 한국영화 중 흥행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더니 인기란 게 이리도 덧없음에랴. 80 ~ 90년대 나는 잊힌 이름이었다. 간간이 국회의사당이 내 집이요, 관악산 어귀에 내 기지가 있고, 주 활동 무대가 독도라는 둥 우스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전부였다.

내가 다시 '뜬' 것은 키덜트(kidult) 문화 덕이었다. 어린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는 어릴 적 향수를 못 잊는 어른을 일컫는다. 동심 마케팅이 뜨면서 내 옛날 사진과 포스터, 나를 본뜬 프라모델.완구가 비싼 값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지난해 아시아로보원 대회에선 마징가제트를 한주먹에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덕택인지 한국의 만화 영웅 1위로 뽑히기도 했다. 다시 전성기를 맞은 느낌이다.

서른 생일에 앞서 내일 조촐한 잔치가 열린다. 서울 국제 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에서 76년 작 복원 필름 상영이 그것이다. 지난해 10억원을 들여 복원했다. 7월엔 입체 한류 애니메이션으로의 재탄생 계획도 발표될 예정이다.

요즘 와선 산업계에서도 부쩍 내 이름이 많이 불린다. 국가 미래산업인 '로봇 한국'의 기수라는 것이다.

인생의 뜻을 세운다는 나이 서른, '한류 스타'냐 '로봇 한국의 대표선수'냐 그것이 문제다.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