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무슨 교재를 쓰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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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어를 잘하는 학부모도 많다. 대부분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갖춘데다 유학.파견 등 해외거주 경험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교육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갖췄거나 원어민에 가까운 분들도 종종 만난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가 더 이상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세계화가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꿈을 펼칠 것임을 절감한다.

그런데 영어를 좀 안다 하는 학부모 상당수는 아이가 사용하는 교재에 유난히 민감하다. 이 학원에서는 파닉스 교재로 무얼 쓰는지, 읽기 교재는 어떤 걸 쓰는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자기 아이는 무슨 교재를 마쳤으니 그 다음 시리즈 교재를 사용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상담하면서 무조건 교재부터 보자는 학부모도 있다. 그리고 사용하는 교재가 자기 아이가 이미 공부한 것이면 두말 않고 돌아서기도 한다.

적잖은 학부모들이 시중에 나온 아이들 영어교재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갖고 순차적이고 연속적인 시리즈 학습을 요구한다. 각종 파닉스 교재와 읽기 교재, 코스북을 순차적으로 수업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영어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린이 영어교육에 대해 어른들이 빠지기 쉬운 대표적 오류다. 많은 학부모들이 아이들 학습과 교육에 대해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특히 영어는 더욱 그렇다. 영어는 대학입시를 위한 주요과목으로만 생각해 어릴 때부터 탄탄히 공부해야 할 과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아동의 연속적인 주요 활동 발달 연구'라는 이론이 있다. 이에 따르면 아이들의 발달에는 연속된 주요 활동의 기본 진행순서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놀이라고 한다. 모든 활동은 놀이에서 시작한 뒤 비로소 교실수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쉽게 말해 아이들에게 있어 학습은 바로 놀이라는 생각의 대전환을 해야 하는 것이다.

놀이는 언어습득의 기초가 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기르고 상상력을 키우며 신체능력을 숙달하고 흥미와 집중력을 기르게 된다. 더구나 모국어가 아닌 영어의 경우 놀이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처음으로 외국인들을 접하고 전혀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하는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하고 의사소통 능력을 확장하게 된다.

필자가 근무하는 영어학원에서는 5세 반의 경우 파닉스 교재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영어로 다양한 활동과 놀이를 마음껏 하도록 프로그램이 구성돼 있다. 1년 정도 지나야 비로소 파닉스 교재 등을 활용한 본격적인 영어훈련을 하게 되며 그래야 학습효과도 높다.

영어유치원과 상담할 때 학부모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무슨 교재를 사용하는지가 아니다. 다양한 영역별 놀이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한 지, 수업이 읽기.쓰기 위주로 짜여 있는 것은 아닌지, 고른 발달을 돕는 다양한 통합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는지 우선 살펴야 한다.

'메피스토펠레스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악마의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현상을 일컫는다. 아이들 영어학습의 본래 목적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학습을 강요, 결과적으로 영어를 싫어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초.중등 7차 교육과정과 달리 6차 유치원교육과정이 적용되고 있다. 6차 교육과정에서 중시하는 미래 인재교육은 의사소통 능력을 최우선 과제로 손꼽는다. 21세기 지구촌을 이끌어갈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습득은 이제 필수다.

정말 한국어와 영어로 마음껏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로 기르고 싶다면 아이가 지금 무슨 교재를 어디까지 마쳤는지 조바심 낼 것이 아니라 마음껏 놀게 하는 학원으로 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이기엽 워릭영어학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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