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에 띄우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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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가 바뀌고 폭설까지 내린 산사에서 「참회」의 나날을 보내시느라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국민을 향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연희동을 떠난 지가 두 달이 다 되었고 해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국회광주특위는 최규하씨와 함께 귀하를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했습니다.
증인으로 채택하는 과정에 민정당은 불참했고 야당만으로 그 같은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들 정지권과 정당내부의 사정이 어떠한지 소상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어떻든 이 문제로 정국은 또 한차례 파란이 일 전망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검찰의 5공 비리 특별수사부는 79년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측근에서 보좌해온 이학봉씨를 직권남용협의로 12일 구속했습니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5공 시절 귀하의 손과 발이 되어 견마지로를 다했던 인사들이 잇따라 더 구속되리라고 합니다. 또 귀하가 만든 민정당은 당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출당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군대 선배이자 귀하의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차규헌·김종호씨가 구속됐습니다. 그밖에도 귀하를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친인척은 또 어떻습니까. 형님·동생·동서·처남·처삼촌…. 굴비 두름 엮이듯 엮여 들어가는 면면들에 국민들의 마음은 착잡합니다.
국회의 5공 비리특별조사위원회도 해를 넘기면서 귀하의 증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세동씨 등이 몇 번씩 불려나왔지만 거기서 거의 시원한 해답이 나오겠습니까.
5공 비리나 광주문제나 친인척 및 측근의 비리가 모두 귀하로부터 연유했고 귀하만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해결할 수 있을 뿐이란 것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는 요즘 입니다.
산사에 은둔하고 속으로 참회만 해서, 이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5공 척결」진통이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청문회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귀하가 나서야만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고 비리의 척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도 백담사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하지 않는데서 엄청난 국력의 소모현상이 야기되고 국민들은 마음이 우울하고 불안합니다.
언제까지 부하와 친인척들이 귀하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속죄의 구속행진을 계속해야만 할까요.
귀하가 청와대를 차지하고 나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국운상승기」가 모처럼 왔는데 언제까지 비생산적인 논쟁과 대립으로 국가의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할까요.
끝내 정치인이기보다는 의리를 존중하는 군인이었고 남달리 애국심을 강조했던 귀하에게 단도직입으로 묻고자 합니다. 귀하의 애국심에 비춰 지금의 이 상황에서 귀하가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귀하 때문에 국가발전이 지체되고 국민간에 불화와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은 아마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귀하는 서울을 떠나며 국민에게 사죄하는 성명에서 『국민이 가라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실천이며 이제 군인답게 그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옛 부하들이 지금 받고있는 고통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단계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귀하가 열쇠를 쥐고있는「5공 비리」의 여러 사안들에 대해 남김없이 솔직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뿐입니다.
여·야당이 시비를 벌이기전에 스스로 청문회에 나와 국민을 상대로 소상한 설명을 해야만 실타래처럼 얽힌 5공 비리를 청산하는 실마리가 풀리고 부질없는 국력소모도 그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걱정이 됩니까. 전직 대통령의 위신과 국가의 체면입니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법 앞에 평등」을 몸으로 실천해 보이는 전직 대통령과 비리척결에 성역이 없는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신이 서고 명예를 얻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닐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청문회에 나서는 것이 국가의 체면에 손상이 간다는 시각 자체가 청산해야할 과거의 일부라면 지나친 말일까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신분을 갖고 예우 받기를 원합니까.
많은 국민은 80년 이후 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한 귀하를 진정한 의미에서 대통령으로 예우하는 것을 심정적으로 거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있습니까. 「보안사령관 육군소장 전두환」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있었던 과거를 무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당성이 문제가 된 과거라면 지금 다시 한번 그 정당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그 점에서 국민들은 귀하와 또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 최규하씨가 당당하게 청문회에 나와 국민 앞에 증언을 해야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서면질의니, 방문청취니 하는 구구한 편법은 사태의 본질과 상황에 비춰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우리의 국회는 당신이 나온다면 비공개증언까지도 생각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국민 앞에 낸 사과성명이 진심이라면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됩니다.
양식 있는 우리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기대대로 진실을 밝히되 예의는 갖출 것이고 역사를 통해 집권자의 회개에 관대했던 우리 국민들은 귀하의 진실한 증언을 듣고 나면 처벌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안식처를 백담사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에서 찾아야합니다.
지금은 결단을 내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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