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앉아서 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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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앉아서 마늘까'면 눈물이 나요' - 이진명(1955∼ )

처음 왔는데, 이 모임에서는 인디언식 이름을 갖는대요

돌아가며 자기를 인디언식 이름으로 소개해야 했어요

나는 인디언이다! 새 이름 짓기! 재미있고 진진했어요

황금노을 초록별하늘 새벽빛 하늘누리 백합미소 한빛자리

(어째 이름들이 한쪽으로 쏠렸지요?

하늘을 되게도 끌어들인 게 뭔지 신비한 냄새를 피우고 싶어하지요?)

순서가 돌아오자 할 수 없다 처음에 떠오른 그 이름으로 그냥

‘앉아서 마늘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완전 부엌 냄새 집구석 냄새에 김빠지지 않을까 미안스러웠어요

하긴 속계산이 없었던 건 아니었죠

암만 하늘할애비라도

마늘짓쪄 넣은 밥반찬에 밥 뜨는 일 그쳤다면

이 세상 사람 아니지 뭐 이 지구별에 권리 없지 뭐

근데 그들이 엄지를 세우고 와 박수를 치는 거예요

완전 한국식이 세계적인 건 아니고 인디언적인 건 되나 봐요

이즈음의 나는 부엌을 맴돌며 몹비 슬프게 지내는 참이었지요

뭐 이즈음뿐이던가요 오래된 일이죠

새 여자 인디언 ‘앉아서 마늘까’였을까요

마룻바닥에 무거운 엉덩이 눌러 붙인 어떤 실루엣이 허공에 둥 떠오릅니다

실루엣의 꼬부린 두 손쯤에서 배어나오는 마늘 냄새가 허공을 채웁니다

냄새 매워 오니 눈물이 돌고 줄 흐르고

인디언 멸망사를 기록한 책에 보면

예절바르고 훌륭했다는 전사들

검은고라니 갈까마귀 붉은구름 붉은늑대 선곰 차는곰 앉은소 짤막소……

그리고 들 중 누구의 아내였더라 그 아내의 이름 까치……

하늘을 뛰어다니다 숲속을 날아다니다

대지의 슬픈 운명 속으로 사라진 불타던 별들

총알이 날아오고 대포가 터져도

‘앉아서 마늘까’는 불타는 대지에 앉아 고요히 마늘을 깝니다

눈을 맑히는 물 눈물이 두 줄

신성한 머리 조상의 먼 검은 산으로부터 흘러옵니다



인디언의 이름 짓기는 독특했다. 성장기에 두드러지는 성격이나 특질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 사이버 공간의 아이디를 버리고 인디언식 이름을 지어보자. 그리고 자주 불러주자. 새로 지은 이름이 나다. 새 이름이 그대의 꿈★이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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