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에 맞은 찬호, 웃은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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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박찬호(33)가 5년 장기 계약의 마지막 해인 올시즌 들어 마운드에서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6일 애리조나전까지 지난 9경기에서는 없었다. 그런데 박찬호는 겨우 5⅓ 이닝 동안 10안타 10실점(10자책)으로 난타 당한 22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2회말 시애틀의 호세 로페스를 2루수 플라이로 잡은 후에 처음으로, 그리고 4회 일본인 톱타자 이치로에게 우전 안타를 허용한 뒤 두번째로 웃었다. 그도 어이가 없었던지 웃어 넘길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인생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도 자신의 구위, 컨디션에 상관없이 악재들이 겹치면서 수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갈 때가 있다.

지난 1999년 4월24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LA 다저스전. 경기 전 비가 쏟아져 당초 20분 가까이 늦게 경기가 시작됐다. 박찬호는 1회초 마크 맥과이어를 삼진으로 처리하는 등 쾌조의 출발을 했고 타선이 1, 2회말 각각 1점씩 뽑아줘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3회초 수비에 들어갔다. 세인트루이스의 첫 타자는 1번 좌타자 대런 브래그. 대런 브래그에게 우전안타, 2번 에드가 렌테리아는 힛바이 피치드볼, 그리고 마크 맥과이어에게 우전안타를 허용했다.

계속해서 4번 타자 페르난도 타티스 타석이다. 초구와 2구 패스트볼이 모두 볼이 됐고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던진 공이 좌월 만루홈런으로 이어졌다. 이후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았으나 6번 엘리 마레로에게 좌월 솔롬홈런을 내줬다. 그리고 연속 2개의 포볼로 1사 1, 2루 위기를 다시 맞았고 번트 타구를 처리하지 못해 다시 만루. 세인트루이스의 토니 라 루사 감독은 9번 투수 호세 히메네스에게 보내기 번트 작전을 구사했는데 박찬호가 번트 타구를 잡아서 3루에 던진 것이 세이프돼 야수 선택으로 다시 만루가 됐다. 박찬호는 다음 타자 1번 대런 브래그를 1루수 땅볼로 유도했으나 홈으로 송구한 것이 포수의 발이 떨어져 세이프되고 말았다.

다저스의 데이비 존슨 감독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항의했으나 퇴장만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에드가 렌테리아의 우전안타 등으로 계속된 만루에서 다시 4번 페르난도 타티스가 들어섰고 볼카운트 2-3에서 커브를 던지다가 좌중월 만루홈런을 또 맞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타자에게 1이닝에 2개의 만루홈런을 맞은 순간이다. 페르난도 타티스의 1이닝 8타점 역시 메이저리그 신기록이다. 그리고 박찬호는 마운드를 페레스에게 넘겼다
지금도 왜 데이비 존슨 감독이 박찬호를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마운드에 놓아두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후 7년이 흘렀다. 이번에는 시애틀의 세이프코 필드이다. 박찬호는 1-0으로 앞선 2회말 수비에서 시애틀의 5번 칼 에버렛에게 우전안타를 내준 것을 시작으로 8번 제레미 리드까지 4연속 안타를 허용했다. 9번 베탄코트의 스퀴즈 번트를 자신이 잡았으나 이미 늦어 야수 선택이 됐다. 그리고 1번 이치로에게 중전안타를 내줬고 2번 호세 로페스를 2루수 플라이로 잡아 천신만고 끝에 원아웃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숨을 돌린 것도 잠시, 3번 라울 이바네스에게 중월3점홈런을 내줬다. 이바네스는 전 타석까지 박찬호에게 19타수 1안타에 머물던 타자이다. 결국 박찬호는 2사 후에 칼 에버렛에게 솔로 홈런 하나를 더 내주는 등 2회에만 11타자를 상대로 8점을 허용했다. 여기서 또 한번 의문이 생겼다. 왜 샌디에이고의 대런 볼슬리 투수코치는 그 지경이 되도록 단 한번도 마운드에 올라가지 않았을까.

어쩌면 투수는 그래서 외로운지 모른다. 자신이 공을 던짐으로써 야구가 시작되지만 때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장윤호 JE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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