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왕이 바람타고 등극하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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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등장인물>
대천댁(60대 후반, 매사에 긍정적이며 담담한 성격) 과부댁(40대 후반, 적극적이고 괄괄하며 과감한 성격)
서울댁(30대 초반, 표준어를 사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장씨(50대 초반, 우유부단한 성격).
여자 A, B, C
말남이(20대 초반, 안경을 쓰며 덩치가 크다)
시간 : 현대(겨울)
장소 : 어촌의 김 건조장
무대배경 : 석양이 지는 초저녁이다.
무대 뒷면에는 여러개의 ①발강이 있으며 ②말목 ③김구럭 ④부표 따위의 물품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다. 막이 끝날 때까지 발장에 물김을 너는 행동으로 처리하여 행동의 일치감을 보여야 한다.
막 오르면 대천댁과 과부댁이 물김을 발장에 널면서….
주 : ①발장 : 물김을 붙여 건조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발
②말목 : 김발을 지탱해주는 굵고 긴 나무기둥
③김구럭 : 물김을 담는 그릇
④부표 : 물위로 떠오르는 기구
과부댁-(큰소리로)소문 들었시유. 하여튼 큰일이예유 큰일, 그 갑것들 땜에….
대천댁-다쥑여야혀, 쥑이는게 속 편한겨.
과부댁-동말이 에미 큰 일났구먼유.
대천댁-무신 야그여 큰 일이라니?
과부댁-결국 술집으루 쳐들어 갔구먼유. 아주 큰 쌈을 했었구먼유…. 아, 고년들이 유세를 떠는거예유, 머리끄뎅이 잡아댕기구….
대천댁-동말이 애비 바람난 것 땜에?
과부댁-맞아유, 요즘 젊은 잡년들 도회지에서 온갖 못된 짓 하구 우리 부락에 내려와서 늙은 것들이나 젊은것들이나 몽창 잡아 먹는다니께유.
대천댁-그렇구먼, 그나저나 동말이 에민 몸 좀 괜찮은겨?
과부댁-읍내 변원에선 입원 안해두 된다구 혔는디유. 시방 뒷간 가는 것 두 허리 땜에 죽겠다는가봐유.
대천댁-고년들이 얼마나 행패 부린겨….
과부댁-혹 떼려 갔다가 혹만 붙인 경우라니께유. 시방 입원을 혀야 하는디 그놈의 돈땜에….
대천댁-아니, 병원이 뭣하는 곳인디 그려. 아프면 머리 싸매구 드러누워야하는 곳 아녀. 그란디…
과부댁-동말이 애비가 수협에 빚두 많구 시방까지두 술에 쩔어 가지구있으니 어디 돈 받을 때가 있겠시유. 그라니 그눔들이 그랗게 나왔겠쥬.
대천댁-도둑놈들이구먼. 하얀 옷이 아깝구먼, 아까워. 그란디 석이 에민 왜 항상 늦는져. 좀 빨랑 나올 수 없능겨…. 서울댁 바삐 등장한다.
-사이-
서울댁-(겸연쩍어 하며) 늦어서 죄송해요. 형….
대천댁-왜 맨날 늦는겨. 늙은게 요로콤 기다려야 되겠능가.
서울댁-(침울하게) 석이가 오늘따라 어찌나 울어대는지….
대천댁-(과부댁에게) 그란디 술집말여. 아니 시방 요로콤 바쁜디 누가 처먹는다구 요런 가난뱅이 부락에 고잡년들이 들어온겨.
과부댁-성님두 시방 깜깜한 저녁이구먼유. 가-라-오-낀지 뭔지 하는 것두있다는거예유.
대천댁 -가-라-오-꾸….
서울댁-가라오께요.
과부댁-(대천댁에게)노래 뽑는 기계라구 하드먼유.
대천댁-그랴. 도깨비 방망이 같은 거구만.
과부댁-그 술집이 말이예유. 우리 부락 양식장에 갯병이 심해서 떠난 정주사 그 양반 집에다, 울긋불긋한 전등에다, 꼬부랑 글씨루 뭐라구 썼는지 그런 술병두 가져다가 이건 마치 귀신집처럼…(말끝을 흐리며 멍청하게 앉아있다).
서울댁-(고개를 끄덕인다)
대천댁-그려…. 그나저나 큰일이구먼. 남정네들 혼만 쏙 빼가는 것만 늘어나니….
서울댁-형님! (느닷없이 큰 소리로) 형님!
과부댁-응… 응?
대천댁-쯔쯔…. 야가, 야가 시방 정신이 쏙 빠졌구만. (빈정대듯) 정신 차리라구 아우님.
과부댁-아네유, 정신은 차리구 있다구유, 시방은… (체념한듯)시방은 이곳이 증말이지 신물이 다 나는구만유.
대천댁-왜 그려.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신물이라니….
과부댁-그냥 신세타령이구먼유… 허지만 성님 말남이가 말이여… 성님두 잘알잖여유. 말남이 갸가유 착한 순둥인디, 어떤 잡년인지 잡히는 날이면 내사 그냥….
대천댁-(놀라며) 시방 자네 야그가 참말인겨. 말남이 갸 그랗케 안봤는디….
과부댁-갸만큼은 등꼴이 휘어져도 내사 꼭 훌륭하게 키우려구 했구먼유.
서울댁-(의아해 하며) 우리 석이 아빠도 말남이 학생 착하고 일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다구요. 아마 오늘도 배타러 나갔죠?….
과부댁-갸가 그랴두 심성 하나는 바르구먼. 이 에미 뼈골 빠지게 건조장에서 고생하는거 다 알구 있구먼…. 그란디 고년들이 갸 정신을 쏙 빼간거여.
대천댁-광춘호에서는 말남이 갸 없으면 일이 안된다. 갸가 어찌나 싹싹하게 일하는지 다들 놀란다구먼. 힘두 천하장사구 말여.
과부댁-(한탄조로) 그양반만 있었어두…. 에라, 그리 일찍 갈거라면 내 배는 왜탄겨. 씨라도 안뿌렸으면 내사 마음이라두 얼마나 편할껴.
대천댁-야가, 야가 그란디…. 그만 좀혀.
서울댁-(과부댁을 바라보며) 형님, 그것 좀 이리 줘 봐요.
과부댁-(두리번거리며) 뭘 말여?
대천댁-야가 진짜 정신나갔나보구먼. (성을 버럭 내며) 시방 바가지가 엎어졌잖여! 빨랑빨랑 뒤집어 놓지 않구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겨.
과부댁-(놀라며) 바가지가 엎어졌다구유? 내사 시방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먼. (바가지를 서울댁에게 건네주며) 저… 성님 바가지가 엎어졌는디 설마 말남이가 탄 배에 말여…. 그나저나 날씨가 안좋아서 걱정이내유.
대천댁-옛날부텀 고런 야그가 있었지 먼 시방이 어떤 시상인디 그랴. 그런 야그는 싸가지 없는 여편네나 하는 야그구먼….
서울댁-(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은 서울에서 우리 마을까지 전화가 걸리는 판인데요.
대천댁-그람…. 그람. 서울 야그가 나왔으니 야근디… 나두 서울 구경이나 한번 가봐야 하는디 말여.
과부댁-그라니 객주놈들에게 제값으루 김 팔아서 우리두 한번 가보자구유. 서울가서 빠스두 타보구 가만히 서있어두 저절루 올라가는 것두 타보구 좀 그래봐유.
대천댁-내사, 그랴서 시방 서울공부를 많이 하잖여. (크게 웃으며) 텔레비죤보는 공부 말여.
과부댁-공부라면 지두 어렸울땐 하늘천 따지 정도는 줄줄 외었응깨유. 성님은 무슨 텔레비죤 보구 서울공부한다구 그랴유….
서울댁-정신없는 곳이 서울이예요. 너무 휘황찬란하거든요. 그러니 다들 도회지로 나가는 것 같아요.
과부댁-고건 맞는야그구먼. 아, 이년전에 서울로간 무당집 큰딸안있었능가. 갸두 서울가서 큰돈 한번 벌어보겠다구 올라갔다가 허구헌날 치마만 걷어올리다가 몸만 망치구 애비 없는 아그 하나 달랑 매달구 내러왔잖여.
대천댁-그 에미두 그렇구, 그 딸년두 그렇구… 그래서 옛날부텀 씨가 좋아야 한다구 했잖여. 못살구 못먹어두 양반은 양반이구 쌍놈은 쌍놈인 겨.
서울댁-(싱겁게 웃으며) 양반씨구 쌍놈씨구간에 전 매년 김씨만 조개껍질속에서 잘 자라기만 하면 좋겠어요.
대천댁-올해는 김양식이 잘될 것 같구먼. 바람두 간간이 불어오구 날씨두 꽤 쌀쌀하잖여.
과부댁-지발, 잘돼야 하는디. 재작년엔 갯병이 심해서 망쳤구…. 아, 작년에는 날씨가 따뜻혀서 김이 썩어버리구…. 지랄맞게두 우리 부락에만 유독 김양식이 잘 되지 않았잖아유. 그러니 올해 만큼은 제발…. 그란디 시방은 바람이 너무 쎄유.
대천댁-글씨말여. 하여튼 제발 올해라두 잘 돼야 하는구먼.
과부댁-날씨 맞춘다는건 헛일이여. 라듸오에서 씨부렁거리는 것만 믿구 며칠 기다리다가 태풍이 불어 김이 모조리 사그라지는 적두 있었으니….
서울댁-태풍도 태풍이지만…. 요즘 썩은 물이 앞 바다에 들어와서 용해도 큰일이라고 걱정하던데요.
과부댁-썩은 물이라니?
대천댁-거 있찮여. 공장이란데 말여. 수협에서 높은 사람들이 야그 잘 해준다니까 믿어야지 별수 있능가. 폐수만 흘러 들어오지 않는다면 날씨두 시방 제법 쌀쌀허니 올해는 잘 될수두 있는겨.
과부댁-아니, 성님 그람 썩은 물이 양잿물 같은거유?
대천댁-그려.
과부댁-그놈의 공장…. 불이라두 확 나버려야 할틴디. 고건 그랗구. 성님! 그 수협 놈들 믿을 놈 하나 없다구유. 그놈들은….
대천댁-왜 그랴? 그래두 애써 힘써주는 것 같은디 말여.
과부댁-성님 야그대루 물론 좋은 일두 많이 하는 것 지두 잘 알구 있구만유. 하지만 그 새끼들 말예유. 공장에 가서 야그 한다구 혀두 야그뿐인거구먼유.
대천댁-그 야그 해준다는 것이 어디 좀처럼 쉬운 일인감…. 지 일두 아니면서 말여.
과부댁-그건 그렇지 않구먼유. 술 한잔이면 숨이 꼴깍 넘어갈 놈들인디 야시같은 샥시들 있는 디 끌고가 술 한잔이면 눈 시퍼렇게 치켜뜨구 썩은 물이 어쩌내 허구 우릴 위해 대들 놈들 한 놈이라두 있겠슈. 다 부질없는 짓이구먼유.
대천댁-그려, 허지만 갸들에게 안맡기면 우리가 뭘 어떡햐. 배운 게 있어야지…. 쬐끔이라두 배운게 있어야 씨불어대두 힘이 생기는 법인디 말여. 아니면 우리 여편네들이라두 들구 일어나야 하는디 말여….
이때, 힘없이 말남이 등장.
-사이-
과부댁-아니, 니 배 타러 안나간가?
말남이-쪼께 이따가 나갈꺼구먼유. (대천댁과 서울댁에게) 그간, 안녕하셨시유?
대천댁--오냐, 오냐…. 그란디 닌 왜 그려, 힘이 없어 보이는구먼.
말남이-(씁쓸한 표정)
서울댁-말남이 학생 오늘따라 축 처져 있는 것 같은데….
말남이-좋은 일이 없으니께유.
과부댁-어디 아픈겨?
말남이 -아녜유….
과부댁-남들 다 큰 핵교 가는디…(느닷없이) 그랴서 어쩌란 말여. 이 에미에게 신세타령이라두 하는겨, 시방.
말남이-참, 엄니두. 내사 시방뭐라했슈….
과부댁-(담담하게) 어여, 배타러 나가봐.
말남이-씨부랄거 괴기 한배 잡아봐야 고돌이 판두 안되는디 까짓거 이러나 저러나 밥 세끼 먹기는 매일반 아닌감유.
과부댁-니 어디서 한잔이라두 한겨? 이건 무신 냄새여….
말남이-쬐께유….
과부댁-어떤 년이여, 어느잡년 횟가루 냄샌겨?
말남이-엄니두, 잡것이라니유. 지한티 얼마나 잘해주는디유.
가부택-(대천댁에게) 조눔이 시방 저레유. 남편 복 없는 년이 워디 자식 복은 있것시유. 팔자, 팔자하지만 진 개팔잔가봐유….
대천댁-말남이 니 같은 순둥이가 왜 그려?
말남이-왜유, 시방 지 야그가 틀렸남유. 이젠 다 텄다구유, 텄시유…. 김 말린다구 떼돈 들어와유, 그렇다구 고기나 잘 잡히남. 그저 계집 껴안구 술퍼먹는게 편한 일이지유.
과부댁-(화를 버럭 내며) 그려…. 니 그 찢어진 입으루 야그 한번 시원하게 잘하는구먼. 어디 시방 계속혀봐, 이 에미 속 터지는 꼴 한번 보려면 말여.
말남이-(큰소리로) 그람, 어떡하라는 거예유.
과부댁-이 에미가 느보구 떼돈 벌어 오랬냐, 시방.
말남이-지두 이젠 다 컸구먼유. 뭐가 나쁜지 좋은지 금방 알 수 있어유. 허지만….
과부댁-허지만…. 그랴서 시방 이 에미에게 유세라두 떨어야 직성이 풀린다는겨?
말남이-(안경을 벗으며) 떠나자구유…. 아주 먼데루유.
과부댁-(아주 담담하게) 그러…. 이 에밀 죽이구나서 떠나. 이 에민 한가한 년이 아녀, 니 안경 새로 해줄려면 말여.
말남이-(머리를 쥐어뜯으며) 모르겠슈, 지두….
말남이 급하게 토장
-사이 -
과부댁-(격하게) 그려 맘대루 히봐. 매미가 껌질벗구 며칠이나 사는지 알어, 이 눔아….
대천댁-참는겨, 시방 말남이가 답답한 모양이구먼. 속 편하게 일이나 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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