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져야할 집단행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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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도 저물어 가는데 뒤숭숭한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여야가 모처럼 공감하는 가운데대규모 구속자 석방 조치가 있었건만 일부 석방된 사람들은 바로 그날부터 집회를 갖고 농성을 벌인 끝에 5일 저녁 이들 중 몇 명이 다시 경찰에 연행됐다. 풀린 지 나흘만에 다시 연행된 사람들이나, 연행한 당국이나, 이를 보는 국민이나 착잡하고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고로 죽은 사람의 유족들이 회사 간부에게 죽은 이의 오물을 먹이는 등 가혹행위로 숨지게 했다는,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졌고 고추수매를 요구하는 농민들이 13일째나 군청을 점거하고 고속도로 통행을 막기도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집단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이런 일로 피해를 보는 국민도 다수 있고 많은 국민들이 이제는 『이 나라에 법도, 질서도 없느냐』고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건도 아닌 이런 집단행동에 대해 이제 국민적 공감대 외에서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문제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누구든 자유롭고 평화롭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통로를 보강하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법과 질서를 확립하는 문제다.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막는 법과 질서의 확립도 안되고,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의사표시도 곤란한 것이다.
먼저 당국은 국민 욕구를 수렴함에 있어 목소리 크기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요란한 의사표시에는 성의를 다하고 낮은 목소리의 평화로운 의사표시는 무시한다면 누구나 고함과 몸싸움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합법적이고도 평화로운 의사표시의 통로와 공간을 최대한 개방, 보장하고 그런 의사표시를 과감히 수용하는 다량의 선례를 빨리 만들어 나가야 평화적 의사표시 폭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고추 문제에 대한 정책결단도 빨리 내려야하고 사고 사에 대한보상 역시 충분히 이뤄지도록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석방자들이 외친 「양심수 석방」도 타당성을 따져 합리적 회답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과 아울러 당국은 법과질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오물을 먹이는 등의 가혹행위로 사람을 죽게 한 범법은 치죄돼야 마땅하고 군청과 고속도로는 풀려야한다.
다음으로, 의사표시의 방법도 이젠 개선돼야 할 것이다. 남에게 피해나 불편을 주는 방법, 자기의사를 강제하는 방법은 자제돼야 한다. 평화적이고 절도 있는 문제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김영삼 민주당총재나 김종필 공화당총재도 이점에선 의견을 분명히 했다. 김영삼씨는 국민일보의 칼럼에서 …강압적 행동으로는 누구도 설복할 수 없다…나는 집단행동이나 강압에는 결코 굴복할 생각이 없다』고 했고 김종필씨도 같은 칼럼에서 『…목적을 위한 「집단적 횡포」가 목적 자체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일이 다반사로 빚어졌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화 또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도 이젠 국민이 납득할 한계가 있어야 한타. 독재권력 하에서는 무한투쟁이 정당화될지 모르나 그런 시대는 분명히 지났다. 속도에 이견은 있겠지만 민주화는 진전되고 언로는 트이고 있다.
오랜 교도소생활에서 풀리자마자 다시 투쟁에 나서는 것을 보고 대단한 헌신이요, 용기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다만 1주일이라도 쉬면서 가족·친지도 만나는 것이 인간적이 아니겠느냐는 탄식도 나오는 것이다. 이번 구속자 석방을 하면서 이례적으로 정부와 3야당은 앞으로 범법자는 일반 사법절차에 따라 엄정 처리한다는 합의서까지 만들었고 김대중 평민당총재도 『이제 재야도 국민다수가 침묵을 강요당했을 때 순교자적인 투쟁을 벌였던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시대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투쟁의 모습도, 방법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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