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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선 어떻게 영화를 찍을까, 그대로 따라했더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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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서 김정일의 영화 지침을 낭독하는 북한 배우 리경희. [사진 독포레스트]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서 김정일의 영화 지침을 낭독하는 북한 배우 리경희. [사진 독포레스트]

북한의 영화 현장을 엿볼 수 있는 영화가 13일 개봉한다. 호주 다큐멘터리 감독 안나 브로이노스키가 서구 최초로 북한의 정식 촬영 허가를 받아 만든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다. 고향 호주에서 다국적 대기업들의 탄층 가스 채굴로 인한 환경파괴가 심각해지자,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이를 막기 위해 북한 영화인들의 도움으로 ‘평양 스타일’의 선전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호주 다큐멘터리 영화 ‘안나 …’ #북한 촬영허가 받아 3주간 작업 #선전영화 틀 빌려 환경파괴 고발 #김정일 총애한 배우도 얼굴 비쳐

개봉에 앞서 방한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주위에서 다들 안 된다, 미쳤다고 했지만 2년여 노력 끝에 2012년 21일간 영화제작에 관해 뭐든 찍어도 된다는 북측 촬영 허가를 얻었다. 영화를 본 미국인 관객이 ‘북한 사람들도 우리 같은 인간’이라며 놀라워한 반응이 기억난다. 기존 서구 미디어에 비친 ‘악의 축’ 이미지가 아닌, 북한 영화인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고 밝혔다. 그는 88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 비무장지대를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에 관심을 가져왔다.

영화엔 감독이 평양에서 만난 북한 영화인들의 조언과 이를 바탕으로 호주에서 배우들과 단편 선전물을 찍는 과정이 코믹하게 교차한다. 70여 편의 영화를 만든 공훈예술가 박정주 감독은 그에게 직접 북한 최대 국립영화제작소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곳곳을 안내한다. 부지면적 100만㎢의 이곳 촬영 거리엔 옛 조선부터 타락한 남한과 탐욕스런 일본·중국·유럽 등 야외세트가 갖춰져 있다. 1968년 북한에 나포, 최근까지 송환요청이 거론되고 있는 미 해군 정찰선 푸에블로호에선 유명 감독 리관암이 밀리터리 스릴러 영화 촬영에 한창이다.

브로이노스키 감독

브로이노스키 감독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던 최고 배우 윤수경·리경희도 있다. 촬영가 오태영, 극작가 리희찬 등 북한 영화계 최고 권위자들도 푸른 눈의 감독에게 조심스레 조언을 들려줬다. 작곡가 배용삼은 직접 영화 주제가를 만들어 선사했다. 영화엔 또 ▶감독은 인민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독립적인 예술가이며 창조적 사령관이다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 등 김정일의 영화 지침도 소개된다.

공장 노동자를 연기하기 위해 직접 생산 일선을 체험하거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연기 전 앉았다 일어섰다를 수차례 반복하는 북한식 연기 훈련법은 호주에 있는 배우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처음엔 곤혹스러워하던 호주 배우들은 탄층 가스 시추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주민들을 만나고, 자본가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눈뜨며 북한식 선전영화 촬영에 몰입해간다.

애로사항도 있었다. 북한 측 동행자가 촬영 내내 카메라 방향을 확인했고, 출국 전 촬영본을 최종 검토했다.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스스럼없이 대해준 영화인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편집에 신경 썼고 이후 직접 연락하거나, 이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진 못했지만, 그들이 무사하단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완성된 단편은 극 중에도 삽입됐다. 자연을 빗댄 은유로 시작해, 다 같이 긍지를 고취하는 노래를 부르고, 현란한 태권도 기술을 펼치는 등 평양 스타일을 서구 배경에 그대로 도입해 다소 어색해 보인다. 탄층 가스 시추 저지 운동과 연관된 호주 장면들은 북한 장면들과 절묘한 조화까진 이루지 못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국외 매체 최초로 북한의 영화 현장에 가까이 다가간 점은 여전히 이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만든다. 전체관람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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