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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인의 '나이프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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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울시민들 생각에 부자가 되려면 적어도 20억원은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모 리서치회사의 설문조사 결과다. 대다수 국민에게 이만한 액수는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수치일 터여서 거의 모든 사람이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양극화 이데올로기가 키운 꿈치고는 너무나 야무진 꿈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부 최상위 집단을 비교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야기되는 '최대 다수의 최대 불만' 상황은 사실상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만연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다국적 생활용품업체 한 곳이 아시아 지역 열 개 나라 여성을 상대로 시행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가운데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최하위로서 단 1%에 그쳤다. 당연히 외모를 향상시키기 위해 성형수술을 고려했다는 비율은 최상위였다. 눈이 높아도 너무 높아진 결과일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나라만큼 거울이 흔한 곳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욕실 안이나 손가방 속의 거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驛舍).사무실.식당.상점.학교.시내버스 등 공공장소 어느 곳에서나 거울을 쉽게 볼 수 있는 나라로는 우리나라가 가위 독보적일 게다. 원래 거울이란 혼자 있을 때만 이용하는 것이고 공공장소에서의 사용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문명의 진화가 우리만 살짝 비켜간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내면보다 외양에, 자신보다 비교에 월등히 더 많은 신경을 쓰는 나라가 됐다. 얼마 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우리나라 가정에서 머리 손질이나 장신구 구입에 쓴 돈은 읽을거리 구입비의 5.7배에 이르렀다. '얼짱' 혹은 '몸짱' 신드롬에 의한 이른바 '몸 프로젝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연 10조원대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하반기 화장품 회사 한 곳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50세 미만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과반수가 성형수술 의사를 밝혔으며, 최근에는 노장년층에서 이른바 '동안(童顔) 만들기'가 폭발적인 유행이다. 지난 15년 동안 성형외과 의사 수의 4배 증가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추세 자체는 세계 공통이다. 이와 관련해 사회학자 보르도(S Bordo)는 성형수술의 확산이 여성들의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 자체를 '나이프 스타일'(knife style)로 바꾸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관건은 따라서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일 텐데 우리나라는 몸에 칼질을 하거나 하려는 경향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난히 강한 경우다. 이로써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를 떠나 성형의학 내지 뷰티산업으로 목하 대이동 중이다.

현재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신체수선(身體修繕) 열풍의 가속화는 육체의 자본화 혹은 용모의 상품화라고 하는 일반적 차원을 능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산 20억원을 모으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 여기는 것과, 패션모델 뺨치는 몸매가 되지 않은 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곧 모든 양극화 테제가 그러하듯이 외모인식의 양극화 또한 주어진 현실에 대한 끝없는 불복(不服),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 대한 한없는 불만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아무나 쉽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면서 대다수 사람이 스스로를 인생의 낙오자, 패배자, 희생자라고 여기는 국민적 콤플렉스가 우리 시대를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처럼 보편화된 열등의식과 박탈의식을 자산이자 무기로 삼는 집권세력이 있다. 결국 오늘날 한국인의 '나이프 스타일'에는 보다 많은 사람을 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모종의 이념적 편향과 정치적 음모가 은밀히 일조하고 있는 느낌이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