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이찬삼 시카고 편집국장 방문기(2)|호텔로비에 성탄절상징 화분장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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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호텔에서 일하는 발랄하고 예쁜 여자「접대원동무」들은 최근 불어닥친 개방조짐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루는 22세된 한 여자접대원에게『재미교포 총각과 결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이 살기 좋고 영광스런 조국을 왜 떠난답니까. 그 총각이 어버이 수령님의 포근한 품으로 장가들어 이곳에서 함께 산다면 또 모르갔지요』라고 받아넘기며 재미교포는「바람둥이」가 많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고려호텔에 투숙한 재미교포들은 모두 총각이거나 이혼했다고 말하는데 선생님도 총각이십니까』라며 역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북한여성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말 잘하고 농담을 잘 받아넘기지만 대화를 해보면 순진하고 때묻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12월 25일이 무슨 날이냐』고 묻고선 온 세계가 다같이 축하하는 예수탄생일이라고 설명하자『누군가 서방세계에서 온 관광객을 통해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들었지만 우린 그런 것 일없어요(필요 없어요). 그저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동지가 탄생하신 날이나 명절에 모여서 노는 것이 좋지 예수가 뭡네까』라며 눈을 흘겼다. 그 접대원동무가 가리키는 에스컬레이트 쪽을 돌아보니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포인세티아 화분이 놓여 있었다.
순간 기자는 이것이 바로 북한이 당면한 작은 변화조짐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외국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갖다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눈여겨보았더니 6개의 포인세티아 화분이 고려호텔에 있었다. 폐쇄되고 경직된 이곳에 성탄 꽃이 등장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한 탁아소 보모로부터 젖먹이 때부터 배워온 일방적인 이야기, 그리고 학창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귀가 따갑게 외치고 익힌「위대하고 친애하다」는 오직 그 소리뿐이었던 이 사회에 한사람 두 사람 관광객이 던지고 간 새 이야기들이 아가씨는 듣고 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라 생각됐다.
비단 크리스마스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직은 지극히 작은 개방의 물결이지만 40여 년간 굳게 닫혔던 사회의 덧문을 빼꼼히 밀치고 잔잔하게 흘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길가에서도 입맞춤을 하고 서로 부둥켜안는답니까.』
흉칙한 일이라고 그녀는 입을 삐쭉거렸지만 누군가 들려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식사하기 전에 눈감고 머리 숙이는 바보도 있더라』며 기독교신자들을 흉보는 말에도 나는 기뻤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조개구이전문 집이지만 경양식카페로 볼 수 있는 식당 카운터에서 대학생차림의 남학생이 같은 또래의 여 종업원과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너 몇 시에 일 끝나니.』『왜 그러는데.』
『나 너하고 좀 걸었으면 좋겠다 말이다.』
『아직 멀었어.』
『너 오늘 집에 갈 때 앞문으로 나가지 말고 뒷문으로 나와. 나 기다릴게.』
그 대학생은 약간의 취기가 있었으나 상당히 진지했다. 그러나 여자 측은 뾰로통한 반응이었다.
서울에서 있음직한 젊은이들과 별로 다름없는 정경이었다.
고려호텔이 위치한 「창광거리」는 승리식당·약산식당·지짐집·전골불고기 등 20여 개의 각종 음식점이 줄지어 있어 「음식거리」라고도 불리고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이 외식을 하는 장면이나 남녀 젊은이들이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을 자주 대한다.
평양에서 가장 큰 고려호텔이 가까이 있어서 외국 관광객들을 자주 접하고 또 그들로부터 서방사회의 몸짓을 배우기도 하겠지만 이 지역뿐만 아니라 평양시내 다른 곳에서도 가족단위나 남녀가 쌍쌍이 식사하는 광경을 흔히 보게되는 것이 오늘의 평양모습이다.
연간 3만∼5만 명의 관광객이 현재 평양을 드나들고 있으며 앞으로 점차 이를 확대할 것이라는 관광총국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앞서 말한 외적 변화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이른 아침 느닷없이 찾아간 일반살림집(북한에서는 아파트를 살림집이라고 부른다)에서도 기자는 크게 놀랐다.
안내원 없이 무작정 뛰어들어 아파트 출입문을 노크해서 들어간 한 가정집은 침실 2개에 현대식 부엌과 욕조가 있는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냉장고와 가스레인지도 있었다.
무례한 낯선 외래인의 질문에 40대 주부는 친절히 대답했으며 예외 없이『위대하신 수령동지의 은덕으로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고 했다.
직업이 러시아어 번역사라고 말한 이 주부는 남편이 대학교수며 세 자녀를 슬하에 두고 있는데 두 아들은 군에 있고 딸은 공사장에 나갔다고 말했다.
냉장고에는 계란 4개와 김치, 뚜껑이 달린 그릇에 장조림·멸치조림 등이 들어 있었다. 김장독과 된장독이 베란다에 있었고 양말을 꿰매고 있었던지 실과 바늘, 전구가 든 플라스틱통이 안방에 열린 채 있었다.
자신은 월 1백30원, 남편은 1백50원을 받는다는 이 주부는 중류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며 옆집은 방3개의 더 큰「살림집」이라고 말했다.
평양시내에 살고있는 주민들의 수입은 최하 80원에서 1백50원 정도까지라고 하는데 대 달러환율은 1대 2정도로 집세와 학비·병원비 등은 무료다.
어쩌다 찾은 짐이 부유층인지는 몰라도 기자가 선택한 아파트건물 정도는 평양에 무수히 많다. 물론 서울의 서민층이 살고있는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해 보이는 아파트건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힘들고 고된 노동 일을 하더라도 끼니를 걱정하는 평양시민이 없다는 것은 관광단으로 함께 간 재미교포나 안내원, 길가에서 만나 취재한 숱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기자의 확인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북한문제 전문가들이 말한 실상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평양은 북한당국이 특별히 신경을 써서 불구자·극빈자들을 시외나 타도로 내보내기 때문에 아직도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빈민들이 북한전체 인구 중에서는 상당한 비율을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적어도 기자가 본 바로는 평양시내엔 갖가지 상점들이 곳곳에 있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남새(채소) 등 식료품을사는 시민들이 줄지어있었다. 「1백화점」을 비롯해, 2개의 백화점을 갔었는데 생활필수품은1960년대 초 우리 나라 수준이었다.
가슴 띠(브레지어) 눈썹 먹(마스카라) 구홍(루즈) 살결 물(스킨로션) 등 여성용품도 기자의 눈에는 조잡해 보였다.
면 팬티를「짧은 속옷」, 작고 부드러운 서구식 팬티를「위생 빤쓰」, 생리대를「생리 띠」라고 적어놓은 것도 재미있었다.
월남한 북한사람들이 기자회견 때 말해온『두세 달 분의 월급을 몽땅 모아야 양복 한 벌을 사 입을 수 있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데모양복(테토론·모직의 혼방) 한 벌에 2백49원이었고, 양복을 입을 기회가 없어서인지 데모양복 부는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곳이 있어 가보았더니 손전등을 세일하고 있었다.
비누·샴푸·화장품 등이 진열된 곳에 「린수」라고 적힌 병이 있어 자세히 보았더니 샴푸 후 머리 결을 부드럽게 해주는 린스였다.
젊은 부부가 기자 옆에 서서 「린수」를 가리키며『머리를 감고 저걸로 헹구면 어린애 머리털처럼 부드러워진다이-. 신기하제이』라고 속삭였다.
전자제품이 진열된 곳에는 흑백TV 2백35원, 컬러TV 1천5백56원, 소니 컬러TV 2천9백27원이 붙어있었다.
북한산 기타·아코디언·바이얼린·색서폰 등도 팔고 있었는데 매미표 기타는 30원, 개성표 바이얼린은 80원이었다.
5층 크기의 대형 백화점엔 사람들로 붐볐으나 사가는 사람은 비교적 적었고 전기를 아끼기 위해 완전 소등해 어두컴컴한 가운데 장사를 하고 있었다.
평양에선 절전운동이 생활화돼 고려호텔의 경우 복도도 컴컴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불을 켠 후 방 번호를 확인하고 또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화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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