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익히기 단계를 무시하면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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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하다 보면 가끔씩 영어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한국말을 사용하게 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아이들이 영어유치원에 온 만큼은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고 영어만 사용하게 해야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심지어는 아예 원내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학원을 좋은 학원이라 생각하여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린이의 언어습득과 학습, 발달에 관한 이론들을 도외시한 어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낸 교육적 오류다. 어른들은 흔히 영어권 국가에 가서 몇 년 살다 오면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다. 강제로 영어만 사용하는 환경에 아이들을 보내면 마치 영어권 국가에 유학이라도 보낸 듯한 효과를 얻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인지와 학습, 언어습득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발전해 왔다. 그 중 비고츠키(Vygotsky)에 의해 창안된 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이론으로 근접발달이론이 있다. 아이들의 인지발달 가능성은 '근접발달영역'이라 불리는 영역에 한정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의 현재 발달수준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영역을 근접발달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수업은 아이의 발달수준에서 조금 앞설 때만 효과가 있으며, 성인이나 교사 또는 발달이 앞서 있는 친구 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에게 요구되는 학습이나 인지의 수준이 근접발달 영역을 넘어서면 아이는 학습과 탐구의 자세를 포기하게 된다. 반대로 너무 낮아도 아이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실생활에 필요한 기본 어휘도 습득되지 않은 아이에게 한국어 사용을 못 하게 하고 심지어 한국어를 사용하면 벌칙을 주는 환경에서 아이는 탐구와 학습활동을 자연스럽게 외면한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그 상황을 피하거나 불안을 나타내게 되고 결국에는 교사와 어른과의 상호작용까지 포기하게 된다.

아이들이 언어민감기에 이르면 단어에 대한 호기심이 늘고 빠른 어휘력 습득으로 스스로에게 혼잣말을 하는 일이 많다. 이는 자연스러운 언어 발달의 한 단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달의 수준을 무시한 채 무조건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플레이타임 시간까지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학부모를 보면 참 답답하다.

영어유치원의 영어교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원어민 교사가 담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혹시라도 교포 선생이 담임을 맡게 되면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왜 한국어를 사용하는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이 역시도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습득은 언어에 숙련된 전문가(성인)와 초보자(아이)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방적인 교습에 의한 학습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기본으로 하는 상호작용에 의한 습득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의 필요와 요구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표현하고 교사는 영어를 사용해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기호와 상징으로 지속 반응할 때 비로소 영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

처음 영어를 접할 때에는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교포 선생이 더 효과적인 수업을 이끌어낼 수 있다. 경험적으로 보면 영어훈련 정도가 2,000시간 이상 되었을 때 원어민 교사와 적절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약 5,000시간 이상 훈련되었을 때 비로소 영어만 사용하는 환경에서도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학습을 이룰 수 있다.

아이들이 영어를 행복하게 배우게 하는 데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유아교육에 근거한 영어교육 이론과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교육기관마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좋다 나쁘다 식의 소모적 논쟁을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선 교육현장에서는 이미 빠른 속도로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정립하고 대안을 세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이기엽 워릭영어학원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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