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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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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손주환 의원(민정) 신문
-5공의 언론정책은 보도여부·방향·내용·형식까지 지시하고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고 생각하는가.
▲김주언=그렇다.
-당시 언론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지면에 충실히 반영했나.
▲김씨=한 연구의 결과로는 70∼80%를 반영했고 나머지는 언론사 자체 내에서도 저항하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인으로서 언론사를 한마디로 제도권언론이라 매도했는데
▲김씨=당시 신문기자 입장에서 언론계의 모든 종사자를 모두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중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체제 구축에 협조했고 정권안보차원에서 내려온 사항을 받아들인 게 많았다고 생각한다.
-『말』지에 나온 보도지침 중 몇 가지 사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85년10월20일 월드컵축구 1차 한일전에서 전두환 씨가 선수단에 전화한 것을 1면 톱으로 보도하라 했는데 당시 한국일보는 그대로 반영했나.
▲김=85 당시 문화부에 있었으므로 취급 결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느 신문에도 반영되지 않았고 체육 면에도 기사 속에 1단으로 취급됐다. 85년10월30일 이원홍 문공 장관이 문화대회기사를 박스로 취급하라 했는데 어떻게 취급했나.
▲김씨=모른다.
-어느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보도지침이 언론에 정치 권력의 희망대로 수용되지 않았다는 실례들이다. 정부의 보도협조에 대해 편집·제작간부사이에 언쟁과 충돌이 대단히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언론자유와 공정보도의 노력을 위해 높이 평가해야될 대목이 아닌가. 당시 보도지침을 모아둔 것은 장강재 회장의 지시였나.
▲김씨=당시 간부가 아니었으므로 사실여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우리 나라가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여러 이익 집단이 존재하고 정보수요도 증대, 정보의 질과 다양화를 요구하고 있다.
80년대 지면을 분석해보면 정치 위주의 내용에서 탈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이런 지면 변화가 다양한 수요요청에서 나온 자연적인 노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인위적인 정치권력의 홍보 조종의 결과인가.
▲김씨=80년 이후 지면이 늘어 l6면까지 증면 됐다. 정보 욕구와 관련됐다고 보지 않을 수는 없다.
-6.29선언 8개항에는 언론조항이 들어가 있고 언론은 어느 누구도 장악할 수 없다는 입장이 천명돼 있다.(신 증인에게)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지금도 정부로부터 홍보지침 등 강제적 보도협조를 요청 받고 있나.
▲신씨=보도지침을 없애려면 보도지침 폐지선언이 있어야할텐데 폐지선언을 들어본 적 없다.
-(김주언 증인에게) 현재 서울경제신문에서 근무중인 것으로 아는데 현재도 보도지침이 내려오고 있나.
▲김씨=일선기자로서 간부들로부터 아직 들은바 없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어떤 식으로 시행되고 있는지는 잘라 말할 수 없다.
-『말』지에 보도지침을 게재할 때 가롤릭 사제단파 공동 제작한 특별한 이유는.
▲신씨=사제단은 언론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와줬다.
75년 해직당시만 해도 함세웅 신부가 농성현장에 직접 찾아와 도와주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보도지침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사제단의 협력이 필요했다.
-언론인이 정계에 들어가고 법조인·학계인사가 정계에 들어가는 것은 인력교류와 사회 균형적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김씨=당연하다. 그러나 언론인 출신이 정계에 들어가 언론통제에 앞장선 것은 뼈아픈 일로 생각한다.
◇이철 의원 신문
-보도지침의 구체적 사례는 뭔가.
▲김주언씨=사전 검열도 있지만 보도가 된 뒤 축소. 빼달라는 지시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보도지침은 전체 언론통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신문이 첫 번째 나왔을 때 「외채구조 나빠졌다」라는 제목이「공공차관 공급 적극권장」으로 바꿔진 것이 하나의 예다.
-사전·사후검열은 5공 스스로가 만든 안기 법에도 없는데 그것 마저 지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김주언씨=그렇다. 그리고 한국일보에 게재됐던 「두꺼비」만화도 「레이건」을 빗댄 것이 문제가 돼 안기부에 끌려가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몇 달 간 만화 없이 신문이 나갔었다.
-강제보직 변경, 연행됐던 사례는 있는가.
▲김주언씨=그런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당시와 현재의 언론상황을 비교해달라.
▲김주언씨=변한 점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지만 홍보조정실이 공보실로 바뀐 이후 언론인들을 개별접촉하고 있다.
-문공부는 여전히 공보실에서 상황실근무일지를 쓰고 있는 것 등을 볼 때 본질적인 언론통제내용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고 보는데.
▲김주언씨=5공 당시 언론통제의 구습이 정부 내에 잔존하고 있다고 본다. 언론사간부·경영진들을 간접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종무 의원(평민) 신문
-87년 6·29이후인 7월20일자로 된 「향후 시국대처방송 안」이란 자료를 보면 새로운 대통령의 창출을 위해 방송·신문에 어떻게 이미지 메이킹(상징조작)을 지시할 것인지 자세히 나오고 있다.
한 석사학위논문에 따르면 실제 그 당시 TV의 저녁9시 뉴스를 분석한 결과 이 지시와 얼마나 똑같은 내용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직도 언론통제가 있다는 얘기 아닌가.
▲김주언씨=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75년4월5일 조선일보 자유언론 수호 투쟁 위와 한국기자협회 조선일보분회의 공동이름으로 발표된 「조선일보사태의 진상」이란 자료를 아는가.
▲신씨=본인이 쓰진 않았지만 배포엔 관여했다.
-조선일보사주의 증언에 대비해 이 자료의 진위를 확인해두려는 것이다. 이 자료를 어떻게 생각하나.
▲신씨=조선일보의 방차영 사장, 동아일보 김상만 사주, 그리고 동아·조선의 해직기자들이 증언대에 나와 진실을 밝혀야한다.
-보도지침의 극명한 사례가「부천서 성 고문사건」보도에 관한 것인바, 당시 4대 신문을 보니 「검찰발표만을 보도하라」는 보도지침에 얼마나 충실했던가를 알 수 있다.
증인이 알고있는 바를 말해달라.
▲김주언씨=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사실을 인정하자」는 의견과 「사실보도를 하지 말자」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허문도 정무수석이 「성을 혁명도구화 한 점을 부각시키고 폭언만 있었을 뿐 성적모욕을 가한 사실은 없는 걸로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것이 먹혀들어 갔던 것으로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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