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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 잘 되는 일본…70년간 이어져온 채용 신사협정도 깨질 판

중앙일보

입력

‘매뉴얼의 나라’로 불리는 일본, 70년 가까이 이어져온 일본의 채용 지침 매뉴얼이 과연 사라질 것인가.

게이단렌 "채용 일정 앞으로는 발표 안할 것" #인재 확보 경쟁, 외국계 기업 공세에 위기감 #"일본식 평생직장,연공서열 문화는 이제 한계" #"대학이 취업준비센터 될 수도" 우려 목소리 #일본 정부 입장도 오락가락 "학생 입장 고려" #

우리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일본의 게이단렌(經團連)은 1953년부터 '예비 회사원'들인 대학생들과 기업들을 상대로 취업과 채용 활동의 기준이 되는 일정을 발표해왔다.

일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의 입사식 광경[중앙포토]

일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의 입사식 광경[중앙포토]

언제부터 채용 면접을 실시할 것인지, 언제부터 채용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지 등의 시기를 정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예를 들어 2019년 봄 입사 예정인 현재 대학교 4학년생의 경우라면 기업들은 2018년 6월1일부터 면접을 실시할 수 있고, 10월1일부터 채용을 확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이드 라인을 정해온 게이단렌의 나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ㆍ히타치제작소 회장) 회장이 3일 기자회견에서 “게이단렌이 채용 일정을 정하는 건 너무나 어색하다”며 ‘취업활동 룰(일정)’ 이란 제도 자체를 없애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6월 면접,10월 채용 확정’의 룰이 2020년 봄 입사자들에게까지 적용된다고 이미 발표한 만큼 2021년 봄 입사 예정인 대학 2학년생들부터는 게이단렌이 주도하는 채용일정을 발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게이단렌이 발표한 채용 지침엔 취직하는 쪽, 채용하는 쪽을 불문하고 취업과 채용 경쟁이 조기에 과열될 경우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신사협정의 성격도 있었다.

그동안 게이단렌 소속 1400여 기업이 자율적으로 이 규정을 지켜왔다.

이 때문에 기업설명회나 면접, 입사식 등에 참석을 위해 구입한 짙은색 정장 차림의 학생들이 단체로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일본식 취업과 채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풍경으로 자리잡았다.

일본항공(JAL)의 입사식,짙은색 정장을 입은 신입사원들의 모습. [중앙포토]

일본항공(JAL)의 입사식,짙은색 정장을 입은 신입사원들의 모습. [중앙포토]

나카니시 회장이 밝힌대로 게이단렌의 채용지침이 폐지된다면 ‘취업협정’이란 이름으로 관련 제도가 실시된 지 거의 70년만의 대변혁이 된다.

일본식 채용의 대표적인 특징인 ‘대학 졸업생 일괄 채용’ 관행에도 큰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나카니시 회장은 회견에서 "졸업생 일괄 채용과 종신 고용을 축으로 한 일본식 인재 육성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입사원을 같은 시기에 대량 채용해 같은 봉급을 주고 경쟁시키는 일본 기업들의 연공서열과 종신고용 중심의 채용문화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무작정 게이단렌의 지침대로 움직였다가는 외국계 기업들의 공격적인 인재 확보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업들의 위기감도 작용했다.

중국의 IT기업을 비롯한 외국계 기업들이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우수한 학생들을 미리 확보하는 현실에서 일본 기업들만의 '채용 담합'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와 요미우리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게이단렌의 주요 회원사인 소프트뱅크를 비롯한 일부 기업들이 이미 ‘인재 상시채용’방침을 선언했다. 또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은 회사를 골라가는 '공급자가 절대 유리한' 취업 시장에서 게이단렌의 채용지침은 이미 무용지물화 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채용 지침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일괄 채용의 관행이 깨질 경우의 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본항공(JAL)의 입사식,짙은색 정장을 입은 신입사원들의 모습. [중앙포토]

일본항공(JAL)의 입사식,짙은색 정장을 입은 신입사원들의 모습. [중앙포토]

학생들의 취업활동이 앞당겨지면서 대학이 단순한 취업준비 센터로 전락할 수 있고, 특히 2~3학년 생들을 상대로한 기업들의 입도선매가 횡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대학측이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입장도 분명치 않다.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는 3일 자민당 행사에서 “룰을 계속 지켰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다음날인 4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관방장관은 "정부가 (채용지침 폐지에)꼭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고 사실상 입장을 바꿨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EPA=연합뉴스]essions, in Tokyo, Japan, 20 July 2018. [EPA]

아베 신조 일본 총리 [EPA=연합뉴스]essions, in Tokyo, Japan, 20 July 2018. [EPA]

스가 장관은 "아베 총리의 말은 이미 일정이 결정돼 있는 2020년 입사자까지는 룰을 계속 지켜달라는 취지였다"며 "(향후)기업과 대학 등의 관계자들이 학생들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면서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식 인재 채용 방식이 큰 변곡점을 맞고 있다.

도쿄= 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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